당신의 침묵의 언어는 무엇인가요?
당신의 침묵의 언어는 무엇인가요?
  • 심정아
  • 승인 2020.03.25 1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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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아, 자화상, 흑백사진

큰 키에 곱슬이 심한 더벅머리를 하고 껑충껑충 교정을 걸어 다니시던 필립 퍼키스(Philip Perkis) 교수님의 모습은 어딘지 독특한 느낌이어서 먼 거리에서도 금새 눈에 띄고는 했습니다. “Hi, Ellen! how are you?” 미소 띤 얼굴로 반갑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실 때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토끼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고는 했어요. 그래서인지 평범한 그 인사말이 이렇게 들리기도 했던 것입니다.

 

안녕, 엘렌! 세상에는 멋진 장면들이 너무 많아서 난 조금 바빠, 넌 어떠니?” 

 

대학원 시절에 지도교수님의 권유로 그분의 흑백사진수업을 수강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전공자들 틈에 끼어 첫 수업에 참석했던 날, 예습 삼아 익혀 두었던 사진기 작동법이며 광학과 연관이 깊어 보이는 숫자들에 익숙해 지지않아 잔뜩 위축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싱긋 눈웃음을 지어 보이시며, 사진기는 무척 튼튼하게 만들어진 기계이기 때문에 떨어뜨리지 않는 한 망가지지 않는다면서 들고 있던 사진기를 툭툭 치기도 하고 흔들어 보이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진기가 아니라 당신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에요.”

 

수업의 첫번째 과제는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밖으로 나가 칠흑같이 어두워져 아무것도 볼 수 없어지는 순간이 올 때까지 흑백필름 한 통을 찍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당장 일포드 사의 36컷짜리 흑백 필름을 사진기 롤에 감아 두고 해가 지기 만을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거실에 놓인 물건들의 그림자가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할 무렵, 낮의 햇살이 떠나가고 밤의 조명과 그림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거리로 나섰습니다.

첫번째 컷은 전날 내린 비로 공원의 산책로에 생긴 자그마한 물웅덩이의 모습이었습니다. 수면 위로 반사된 나무가지들의 섬세한 실루엣 위로 초저녁의 봄 햇살이 살폿이 내려와 어른거리면서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멋진 장면을 만들어주고 있었습니다.

심정아. 물거울. 흑백사진

붉은 석양을 배경으로 우아한 월츠를 추듯 걸어오는 사람들, 흔들흔들 걷고 있는 그림자들, 어느새 길게 자라 있는 나무 그림자, 부드럽게 뭉개져가는 도시의 모서리, 소리없이 지워져가는 길의 윤곽선,  사라져가는 색채들, 어둠 속으로 퇴장하는 사물들의 뒷모습…

저의 눈은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흑백의 섬세한 그라데이션에 익숙해지면서 그 아름다움 속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신중하게 장면을 선택하고 집중해서 셔터를 누를 때마다 마음이 점점 고요 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것 같아요. “참 좋다…!”

잊지 못할 첫 출사의 경험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고, 더 깊고 아름다운 차원으로 이어졌습니다. 꽤 어두워졌는걸 하고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골목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여긴 어디지 하며 머뭇거리는데, 순간 멍해지고 말았습니다. 어둠이 몰려오더니 길과 건물의 윤곽선들을 순식간에 다 지워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진기 속에는 아직 찍지 못한 필름이 여러 컷 남아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렇게 저는 뿌옇게 번지는 가로등의 불빛 말고는 아무것도 찍혀지지 않는 순간을 갑자기 맞이했습니다. 조금 서둘렀더라면 남겨지는 필름 없이 과제를 잘 마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고, 무언지 외롭고 불안하고 그립기도 한, 그런 익숙한 감정들이 가만히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어딘지 여느 때와는 조금 다른 저 자신을 느끼며 의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런 감정들 때문에 마음이 짓눌리지 않았고 오히려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행복한 기분마저 드는 것이었습니다.

심정아. 자화상. 흑백사진.

 저는 그날도 말로 설명할 수 없이 모호한, 그러나 오랜 시간 익숙해진 감정들을 품은 채로 거리로 나섰습니다. 그런데 사진기의 뷰 파인더를 통해 예민하게 세상을 관찰하고 신중하게 셔터를 누르는 동안, 그런 감정들이 아름다운 형상들 속으로 스며들어가거나 어떤 모습을 입어가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직감했던 것입니다. 어느새 길게 자라나 가만히 몸을 흔드는 나무 그림자의 모습으로, 초봄의 햇살이 내려앉아 거울처럼 반짝이는 작은 물웅덩이 속으로, 그렇게 그립고 아름다운 형상 속으로…

그렇게 그날 저는 이제 그런 모호한 감정들 때문에 더이상 힘들어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언제부터인가 제 안에 쌓여가면서 가끔씩 마음을 짓누르기도 하던 무겁고 어두운 감정들과도 자연스럽게 화해할 수 있게 될 것 같다는 멋진 예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낯선 도시에서 지낸 지 5년째 되던 해, 겨울의 한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초봄의 어느 날 저녁. 그렇게 저는 흑백사진이라는 멋진 화해의 방식을,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운 침묵의 언어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당신이 발견한 침묵의 언어는 무엇인가요?

 

  다시 르동이 그린 여인의 얼굴 앞으로 걸어가 말없이 서 있어봅니다. 아름다운 침묵의 얼굴이 말을 겁니다.

 

괜찮아요…, 안심하세요.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요.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말하지 않은 채로, 오래도록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어도 돼요.

당신을 위해 기도할께요. 당신의 슬픔이 침묵 속에서 가을의 숲처럼 깊고 아름다워지기를.

당신의 절망이 침묵 속에서 강 하구의 조약돌처럼 단단하고 둥그스름해지길.

 

당신이 침묵 속에서 오히려 더 아름답고 충만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되기를.

당신에게 어울리는 침묵의 언어를 발견하게 되기를…

오딜롱 르동. 황금빛 방. 64X80cm. 유화

심정아
드로잉, 오브제 설치, 사진, 영상, 퍼포먼스로 작업하는 예술가 울고 싶어도 제대로 울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다.
뉴욕의 Parsons 와 Pratt대학원을 졸업, 홍익대에서 “Broken Beauty”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작가홈피 www.jungahshim.com

  침묵의 아름다움이 저리도 충만하게 그녀의 얼굴을 채워주고 있으니, 저도 침묵할 수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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