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얼굴
침묵의 얼굴
  • mytwelve
  • 승인 2020.03.11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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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dilon Redon, Silence, 유화, 54.4X55cm, 1911, 뉴욕현대미술관
Odilon Redon, Silence, 유화, 54.4X55cm, 1911, 뉴욕현대미술관

유학시절, MOMA(뉴욕현대미술관)에 방문할 때면 빠뜨리지 않고 보고 오고는 하던 그림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1840~1916)이 그린 <Silence침묵>(1911)입니다. 그렇게 많이 본 그림인데 오늘은 그냥 갈까 하면서도 늘 이 그림이 있는 방으로 걸음이 향하고는 했습니다. 마치 여기까지 와서 잘 아는 이를 만나지 않고 가면 무척 미안해 질 것 같은 마음으로... 그녀는 오늘도 그 자리에서 잘 지내고 있는 지, 그 모호하고 아름다운 얼굴은 변함없이 그대로인지 궁금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돌아보면, 그것은 저에게 누군가의 초상화가 거울처럼 다가왔던 첫번째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한 발자국 떨어진 자리에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마음 속이 고요해지면서 마치 제 마음 속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으니까요.

  주변을 빙 두르듯이 그려진 초록이파리와 여리여리한 장식 선들 때문인지, 타원형의 프레임은 어느 여인의 방에 걸려 있을 법한 우아한 거울을 연상시킵니다. 브라운 톤의 아련함 속에 깊이 잠겨 있는 그녀는 어딘지 빛 바랜 시간 저 편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녀로부터 가슴을 저미게 하는 그리움이 풍겨나와 공기 속에서 자꾸 옅은 향수냄새가 나는 것만 같습니다. 살포시 내려 뜬 눈과 다문 입술 위로 부드럽게 얹어놓은 손의 표정은 어딘지 침묵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침묵... 말로 다 할 수 없음, 말할 수 없음, 말하지 않기로 함.”

 

  그녀의 마음을 내 입을 통해 전달하듯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했습니다. 그녀에게 이끌리듯 찾아가 그 얼굴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고는 했던 이유. 그것은 모호하고 아름다운 얼굴과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일깨워주고 싶어하는 침묵의 의미에 대해 짐작해 보면서 깊은 공감과 위로를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Odilon Redon, Beatrice, 파스텔화, 1885년. 개인소장

눈물이 나올 만큼 아름답다거나, 가슴에 사무치도록 그립다거나,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슬프다거나 하는 깊은 감정들은 적절한 말로 표현해보려 해도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살다 보면 그렇게 언어로 쉽게 담아지지 않는 크고 깊은 감정들을 품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황금빛 태양이 가라앉으며 일몰의 빛에 휩싸인 바다를 마주하고 서 있어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단순한 감탄사 말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지는 순간에 대하여… 무슨 말이건 하고 나면 이 벅찬 감정이 희석되어버릴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침묵하게 되는 심정에 대하여.

예기치 못하던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사람은 어떻던가요. 아마도 그는 어떤 말로도 자신이 느끼는 고통과 슬픔을 표현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그런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어 찾아갔다가 아무런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차라리 함께 침묵하자고 결심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죽음과 고통이 실재하는 곳, 갖가지 이해하기 힘든 상황들이 언제든 눈사태처럼 밀어닥쳐 우리의 입에서 언어를 빼앗아 버리기도 하는 곳입니다.

 

그리하여, 그처럼 말할 수 없었던 감정들, 말하지 못한 감정들은 이름을 갖지 못한 채로 가슴 속 어딘가에 자리하게 됩니다. 그런 감정들은 짙은 어둠에 묻혀 사진기에 찍혀지지 않는 사물들처럼,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 거기 있다는 것을 그 감정을 품은 이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언어로 쉽게 담아지지 않았던 감정들은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위로 한겹 두겹 침묵이 쌓이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어떤 감정들은 흔하지는 않으나 일상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이 되어, 세상의 이해나 언어를 넘어서는 빛과 향기를 품게 되기도 합니다. 마치 동그란 모양과 탱글탱글한 부피를 가지고 있던 포도 알들이 다른 차원의 모양과 부피, 빛깔과 향기를 갖는 포도주로 변화하듯이 그렇게 말입니다. 그리고 어느 햇살 좋은 날 그의 얼굴에 서리는 표정 속에서, 무심코 끄적거린 노트 한 켠의 낙서 속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종일 쏘다니다 찍은 몇 장의 사진들 속에서 그 변모된 모습과 빛깔과 향기를 드러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길었던 기다림 끝에 말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저는 또 다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말이고 대답이었습니다. 오랜 침묵 속에서 더할 나위없이 투명하고 가난해진 그녀의 얼굴이… 그 얼굴에는 어떤  호소도 질문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저도 더이상 호소하거나 질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심정아. 침묵. 흑백사진. 2008.

심정아
드로잉, 오브제 설치, 사진, 영상, 퍼포먼스로 작업하는 예술가 울고 싶어도 제대로 울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다.
뉴욕의 Parsons 와 Pratt대학원을 졸업, 홍익대에서 “Broken Beauty”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작가홈피 www.jungahshim.com

  침묵의 아름다움이 저리도 충만하게 그녀의 얼굴을 채워주고 있으니, 저도 침묵할 수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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