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얼굴을 부를 때
얼굴이 얼굴을 부를 때
  • 심정아
  • 승인 2020.01.21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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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하게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 고깔모자를 쓴 한 남자의 얼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조르주 루오는 희극의 한 장면을 연기하는 광대의 분장한 얼굴 밑으로 깊이 감추어져 있던 ‘비극의 얼굴’을 보았던 것 같아요. 사람들은 그를 한낮 놀잇감으로 여겼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사람들을 향한 연민과 긍휼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루오는 분칠한 광대의 얼굴 아래로, 자신을 위해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 울고 있는 한 남자의 얼굴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을 지 모릅니다. 이 가련한 얼굴이 바로 자신이 갖게 될 얼굴, 아니, 이미 가지고 있는 얼굴일지 모른다고.

엠마누엘 래비나스는 헐벗은 타자의 얼굴과 시선이 마주칠 때, 그 얼굴이 우리를 부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루오는 광대의 얼굴이 그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광대가 되어 고깔모자를 쓴 자신의 얼굴을 그리는 것으로 그 부름에 응답했던 것입니다.

그는 거친 붓질을 사용해 얼굴 가득 검은 그림자를 짙게 발라 놓았습니다. 왼쪽 눈은 그림자 속에 깊이 파묻혀 있고, 누군가를 뚫어질 듯 응시하는 오른쪽 눈에는 두려움과 슬픔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렇게 광대로 분장한 그의 얼굴이 지금 당신과 나의 얼굴 앞에 놓여 있습니다.

루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응시 속에 자신을 놓았습니다. 그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 욕망과 광기에 취해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사람들, 부모를 잃고 홀로 남겨진 아이들, 그리고 이렇게 훌쩍 시간이 흘러, 2019년의 어느 여름날을 살고 있는 당신과 나의 응시 앞에 자신을 놓았습니다.

그의 얼굴 위에서 무수한 응시의 중첩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바라봅니다. 그것은 응시가 불러일으키는 깊은 공감의 경험입니다. 이 경험, 얼굴이 얼굴을 부르고 서로에게 응답하는 경험, 무수한 응시의 중첩들이 서로의 얼굴을 깨우는 경험… 그 깊고 두렵고 아름다운 경험 속에 당신과 내가 있습니다.

 


심정아
드로잉, 오브제 설치, 사진, 영상, 퍼포먼스로 작업하는 예술가 울고 싶어도 제대로 울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다.
뉴욕의 Parsons 와 Pratt대학원을 졸업, 홍익대에서 “Broken Beauty”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작가홈피 www.jungahsh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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