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얼굴을 가질 때까지
하나의 얼굴을 가질 때까지
  • mytwelve
  • 승인 2019.12.03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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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험-조르주 루오의 <미제레레> 앞에서

색채와 소리들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경험 
빛과 그림자의 공간에 기꺼이 발이 묶인 채로 
깊은 슬픔과 무거운 참회의 감정 속에서 
얼굴이 서서히 뜨거워지는 경험 
가련한 인간의 얼굴들이 던지는 응시를 견디어 내며 
어느 순간 감당치 못할 연민과 사랑으로 심장이 파열해버리는 경험

조르주 루오는 1차 대전 속에 처해 있던 참담한 인간 실존의 모습을 5년여에 걸쳐(1922년~1927년) 58점의 동판화 연작 속에 담아냈습니다. “미제레레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제목의 이 연작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모두 끝나고 난 후인 1948년, 그러니까 루오가 작품을 완성한지 20년이 지난 후에야 한정판 책으로 출간될 수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하나 제목처럼 부여해 놓은 문장들을 읽으며 그림 속의 얼굴들을 잠잠히 응시하는 일은 잊을 수 없는 ‘어떤 경험’을 선물해 줍니다.

조르주 루오, 미제레레 동판화연작(58점), 제작:1922~1927, 출간:1948 

“분장하지 않은 자 누구인가?” 저는 매번 이 그림 앞에서 시선이 멈추고는 합니다.
남자는 광대의 고깔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어떤 표정도 갖추지 못한 채로, 깊은 절망의 심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두껍게 분 칠을 한 것 같지만, 실은 어떤 얼굴로도 분장하지 못한 광대의 얼굴. 루오는 이 얼굴을 빌어 결국 이렇게 묻고야 맙니다. “분장하지 않은 자 누구인가?”라고. 
루오는, 아니 당신은 부끄러움으로 뜨거워진 얼굴을 하고, 심장이 파열해버린 후 꺼져버린 목소리를 가까스로 되살려 가면서, 천천히 한 음절, 한 음절 읊조리듯 묻고있습니다. 
“분장하지 않은 자 누구인가?” 

<분장하지 않은 자 누구인가> 보다 20년 앞서 그려진 <우울한 광대>는 청년이던 루오가 스승 귀스타프 모로가 죽자 5년여의 시간을 떠돌며 방황하다가 파리로 돌아와 그린 그림들 중 하나입니다. 

조르주 루오, 우울한 광대, 유화,수채,파스텔, 36X27cm, 1902년, 개인소장

그는 스스로 폭력적인 화가가 되어 거칠고 난폭한 화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치 광대의 짙은 분장들, 거짓된 얼굴들을 모조리 벗겨내려는 것처럼, 린치를 가하듯 그리고 있습니다. 거친 윤곽선들은 그의 가련한 육체 위로 무자비한 채찍질을 가한 결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곳 저곳에 난데없이 번져있는 색채 덩어리들의 무질서한 출연은 수치스런 멍자국들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상처투성이가 된 광대는 얼굴을 측면으로 돌린 채로 한쪽 눈만을 사용하여 우리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꾹 다문 입가에서 무슨 말인가 하고 싶으나 결코 하지 않으려 애쓰는 결연한 침묵의 의지가 느껴집니다. 


저는 문득 그의 얼굴에서 뜻밖의 얼굴을 발견합니다. 놀림 받고 경멸 당하는 자리로 스스로를 내어주는 광대, 난폭한 군중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그의 얼굴에서, 수난자의 얼굴, 모멸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과 침묵과 응시를 통하여 아름다워진, ‘한 얼굴‘을 발견합니다. 
자끄 마리땡은 이렇게 쓰고있습니다. 

“사랑이 끝난 듯 싶은 이 세계의 형태가 추악하게 훼손되지 않을 수도 있을까? 루오는 맹렬한 이미지들에 휩싸여 있었고, 이를 통해 분노를 발산하였다. 그는 원죄와 상처받은 인간성의 비참함에 사로잡혀 이를 표현하는 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때에 이미 그의 그림 속에서 ‘신적 수난과 인간적 잔인성의 경련을 표현하기 위해 탁월하게 얼굴과 육체가 변용된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르주 루오, 성스러운 얼굴, 유화, 91X65cm,1933년, 파리 퐁피두미술관
 

<우울한 광대>(1902년)의 얼굴에서 그의 대표작으로 사랑받고 있는 <성스러운 얼굴>(1933년)을 향하여 걸어가는 30여년의 여정 속에서, 루오는 고깔모자를 쓴 광대에 자신을 투영한 그림들을 무수히 그려 놓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마치 자신의 회화 세계의 필연적 과업 과도 같이 수행해 나갔던 것 같아요. 
수많은 광대의 얼굴들을 빌어 자신의 얼굴을 그려나가는 동안,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기도했던 것일까요? 그의 영혼이 ‘하나의 얼굴’ 을 갖게 되기를, 그리고 그 얼굴이 모진 수난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름다운 빛을 발하며 다가오시는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얼굴>과 닮아 있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이리라 짐작해 봅니다. 

조르주 루오, 트리오, 72X57cm, 1943년, 릴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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