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세례파의 역사와 특징
재세례파의 역사와 특징
  • 정현욱
  • 승인 2019.10.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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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면서

재세례파는 ‘다시(재:再) 세례(洗禮)를 받는다’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입니다. 필자는 칼뱅주의 개혁파를 따르는 목사이기 때문에 재세례파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역사적 개요와 신학적 주제에 대한 설명은 칼뱅주의 입장에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재세례파는 루터의 인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칼뱅과도 계속된 악연을 이어갔습니다.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 아래 함께 종교개혁을 진행하던 재세례파가 왜 기존의 종교개혁자들과 등을 돌리게 되었고, 원수 같은 존재가 되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재세례파는 종종 평화와 화목의 대명사처럼 사용되는 동시에 혁명과 폭력, 살인과 공산주의라는 단어들과 그리 멀지 않습니다. 이러한 포괄적인 재세례파의 특징 때문에 어떤 이들은 온순하고 평화로운 사람들로 이해하지만, 다른 이들은 살인을 정당화하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대상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극단적 이해는 재세례파가 가진 다양한 스펙트럼과 신학적 특징 때문입니다. 츠빙글리 이후 곧바로 칼뱅이나 그들의 후계자로 넘어가지 않고 재세례파를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이유는 이후의 역사에 있어서 재세례파가 주도적이진 않지만, 교회 안과 밖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미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칼뱅은 재세례파였던 세르베투스를 제네바에서 학살했다는 누명을 쓰게 됩니다. 이 부분은 정요한의 <칼뱅은 정말 제네바의 학살자인가?>(세움북스)를 참고하시면 상세한 이야기를 아실 수 있습니다. 칼뱅은 학살자까지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루터와 더불어 재세례파를 반대했고, 질서와 하나님의 성경을 오독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반대와 거부에도 불구하고 개혁자들은 재세례파가 가진 다양한 장점들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후대에 교회개혁과 성령 운동의 중요한 모토가 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교회역사학자가 아닌 필자로서 모든 것을 명확하게 밝힐 수는 없으나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재세례파에 대한 지식을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칼뱅주의를 따르는 목사로서 재세례파의 주장을 모두 옹호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신학과 사상을 들여다봄으로 터부시된 그들의 신학과 성경관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재세례파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용어부터 정리하겠습니다. 재세례파는 칼뱅주의 입장에서 명칭 된 것으로 자신들은 ‘재침례파’로 부릅니다. 세례보다는 침례가 더 성경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세례(洗禮)와 침례(浸禮)에 대한 명칭 논쟁은 사사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성경 해석관입니다. 엄밀하게 성경에서 세례를 편의상 의역된 것으로 엄밀하게 ‘침례’가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세례는 적은 물을 머리에 뿌리는 행위입니다. 반면에 침례는 호수나 강 등에서 자신의 온몸을 물속에 담그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세례로 번역된 단어는 밥티스마(βαπτισμα)는 온몸을 물에 담그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세례파는 이러한 사소하지만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는 잘못된 것인가? 후에 다시 성경 해석에 관한 부분을 다루겠지만, 이곳에서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사소하지만 중대한 차이라고 여기는 이유는 개혁교회는 세례 자체 의식보다는 세례의 상징적 의미에 무게를 둡니다. 즉 성령에 의해 이미 거듭난 사람들이 세례식을 통해 공동체에서 재확인 또는 승인되는 예식입니다. 하지만 재세례파는 ‘침례’를 행함으로 외부적 고백과 내부적 고백이 일치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침례를 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침례’라는 방식을 고수했습니다. 자신의 신앙고백과 침례 예식을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신앙고백을 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신앙고백과 더불어 침례를 받게 합니다. 그러나 칼뱅주의는 부모의 신앙을 통해 어린아이에게 세례를 베풂으로 유아세례를 허락할 뿐 아니라 장려합니다. 재세례파는 타인의 신앙에 의해 고백된 신앙은 잘못되었기 때문에 재세례파에 가입하면 ‘다시 침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저는 재세례파의 성경을 순수하게 믿으려는 시도와 성경관에 대해 대단히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칼뱅주의가 추구하는 유아세계는 공동체적이며, 교회론적이라는 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재침례라는 표현보다는 재세례라는 칼뱅주의적 신학에 따라 그들을 그렇게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혹 전체적인 흐름이나 문맥상 세례가 아닌 침례로 표현될 수 있음을 먼저 알려 드립니다.

2. 재세례파의 역사 개요

“재세례파 운동은 초대 기독교 운동은 초대 기독교의 복원 프로그램을 가장 철저하게 실천하려는 노력의 결과로서 츠빙글리 자신이 활동했던 지역에서 발생하였던 것이다. ... 그들은 동시대인들보다 훨씬 철저하게 성서를 연구해서 초대 교회의 모습을 재발견하려 했다.”(롤란드 베인튼<종교개혁사>)

베인튼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철저하게 성경을 연구해서 초대 교회의 모습을 재발견하려 했다.’는 점은 재세례파가 갖는 중요한 특징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하게 반응하려 했던 재세례파는 왜 종교 개혁가들의 거부와 국가들로부터 배척과 핍박을 받아야 했는지 그들의 신학 사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521년 1월 21일, 십여 명의 사람들이 취리히의 거리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좁을 골목을 의연하지만 비장한 각오로 걸었습니다. 민스터 교회당 근처에 자리한 만츠의 집으로 들어갔고, 그곳에는 시의회로부터 성경 공부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과 펠릭스 만츠(Felix Manz)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의회는 시민들에게 아이를 낳은 후 8일 이내에 세례를 받도록 했고, 만약 어길 시에 추방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이것을 의논하기 위해 만츠의 집에 모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소식들을 나누고 하나님께 개인적인 신앙 고백에 의거해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한 전직 신부 조지 블라우록(George Blaurock 원명:Jörg vom Haus Jacob 1491-1529)에게 그레벨은 즉석에서 세례를 베풉니다. 조지 블라우록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다시 세례를 베풉니다. 이리하여 종교개혁의 중요한 다른 집단인 재세례파(Anabaptist)가 탄생합니다. 후에 이들을 통해 메노파와 후터파가 생겨납니다. 이들은 실제로 아직도 16세기 당시의 옷과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재세례파는 직접적인 후손인 메노파와 후터파 뿐 아니라 침례교와 퀘이커 교도들도 포함합니다.

조지 블라우록에 세례를 베푼 펠릭스 만츠는 울리히 츠빙글리를 도와 취리히의 종교개혁을 이끌었습니다. 루터가 요한 에크와 논쟁하던 1519년 만츠는 취리히의 대 민스터 성당의 사제로 부임합니다. 그는 설교를 통해 종교개혁을 시작합니다. 의식 중심의 예배를 설교 중심으로 전환하고 강당에서 개혁된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강해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취리히에서 강력한 인기를 얻었고, 많은 사람들이 호응했습니다. 그레벨 역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을 지지합니다. 루터는 성경이 금하지 않으면 허락하는 중립적 개혁을 시도한 반면, 츠빙글리는 성경적 원리에 의해 반성경적인 것들은 모두 없애야 한다며 철저한 개혁을 주장합니다. 이것은 종교개혁 흐름에 많은 소요를 일으킨 아디아포라 (adiaphora)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그레벨과 만츠는 츠빙글리 지도하에 성경을 공부를 하면서 많은 부분에서 동의했지만, 유아세례만은 결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취리히는 도시국가 형태였으며, 새로 태어난 아이는 저절로 시민이 되기 때문에 시민으로서 유아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레벨과 만츠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교회는 국가와 분리되어야 하며, 세례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1524년 가을, 그레벨의 아내가 사내아이를 낳았을 때 문제가 대두됩니다. 시의회는 1525년 1월 17일 공개논쟁을 했고, 유아세례를 옹호한 츠빙글리의 승이었습니다. 시의회는 토론 후 일주일 안에 세례를 베풀지 않는다면 추방한다고 경고했고, 결국 이들은 만츠의 집에 모여 세례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이들은 며칠 후 취리히를 떠나 졸리콘(Zollikon)이란 촌으로 이주합니다. 이곳에서 재세례파라는 집단이 조직됩니다. 국가와 교회의 분리라는 선진적 교회 방식이 최초로 탄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국가적 형태의 교회는 당시로써는 대단히 위협적이고 비성경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취리히시는 곧바로 경찰들을 졸리콘으로 보내 체포하고 투옥합니다. 얼마 가지 않아 석방되자 이번에는 인근 지역들을 찾아다니며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단순한 협박으로 재세례파를 막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른 취리히 당국은 그들을 물에 빠뜨려 사형에 처하기로 결의합니다. 다시 세례(침례)를 받으려는 것을 조롱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결국 일 년이 되지 않은 1527년 1월 7일 지도자였던 펠릭스 만츠는 재세례파 최초 순교자가 됩니다.

재세례파는 박해를 피해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피신합니다. 하지만 박해는 그곳에서도 여전했습니다. 1529년 스파이어 제국회의는 재세례파를 이단으로 정죄합니다. 단지 좀 더 성경적으로 살아가려는 열정을 가진 그들에게 왜 그렇게 잔혹한 핍박을 가하는 것일까요? 그들의 요구는 사소해 보였지만 당시 사회관으로서 재세례파의 요구는 국가의 기반을 뒤흔들고 사회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위협적인 존재로 보였습니다. 철저히 양심을 따라 행하려 했던 재세례파는 순교를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재세례파는 양심을 따라 행하는 핍박과 순교를 자랑스러워했고, 자녀들에게도 기꺼이 죽음을 각오하라는 권면을 멈추지 않습니다. 

조지 블라우록은 티롤지방으로 옮겨 선교합니다. 가톨릭은 재세례파를 발견하고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1529년 9월 6일 블라우록은 이곳에서 화형을 당합니다. 재세례파는 더욱 북쪽으로 피신해 갑니다. 모라비아(Moravia) 지방에 이르러서야 겨우 숨을 돌리게 되고 정착합니다. 이곳에서 비뤼더호프(형제촌)라는 기독교 공동체를 결성하게 됩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초대교회의 형태를 따라 살아가려 했습니다. 개인 소유는 없으며 공동으로 재산을 관리했고, 자신의 입술로 신앙을 고백할 때 세례를 주었습니다. 개인보다 형제애를 우선시하여 공동체 형태로 살아갔습니다. 이들은 지도자 역할을 하던 야곱 후터(Jacob Hutter)의 이름을 따라 ‘후터파(Hutterits)’로 불립니다. 이들은 후에 진젠도르프의 지도하에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되고, 존 웨슬리 등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온순한 재세례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루터와 함께 라이프치히 논쟁에 참여해 요한 에크를 공격했던 토마스 뮌처는 재세례파인 동시에 혁명적 변혁을 추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농민 운동을 주도하다 1525년 5월 27일 사형을 당합니다. 그리고 5년 후에 1530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뮌스터에서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납니다. 얀 마티스라는 인물이 광신적 신앙을 뮌스터 사람들에게 불어 넣어 천년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군대가 그들을 포위하고 재세례파는 무력을 동원하여 방어와 공격을 감행합니다. 1534년 여관 주인이었던 라이덴의 얀이 권력을 쟁탈하여 군림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구약처럼 일부다처제를 주장할 뿐 아니라 자신을 ‘다윗 왕’으로 부릅니다. 극도의 사치를 부렸으나 주민들은 기아에 허덕여야 했습니다. 결국 1535년 6월 24일 군인들에 의해 성은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며 막을 내립니다.

뮌스터 사건 이후 저지대 라인에 살았던 이들은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의 헌신 덕분에 철저한 비폭력 공동체로 전환합니다. 이들은 후에 메노나이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유럽에서 극심한 핍박을 피하지 못했던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캐나다와 미국 등으로 이주하면서 정착하게 됩니다. 

3. 나가면서

재세례파의 등장은 중세가톨릭 교회에서 개신교회가 탄생한 것과 맥을 같이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돌아가려 했던 이들이었습니다. 루터보다는 츠빙글 리가, 츠빙글리보다는 재세례파가 더욱 성경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이들은 근원적(Radical) 개혁을 추구했던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정교분리가 모호한 상황이지만 16세기 때 이미 재세례파는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주창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학과 신앙관은 당시 중세적 봉건주의와 전근대적(前近代的) 시대 속에서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앞서간 그들의 사상은 곧 기존의 국가들로부터 질서를 어지럽히고 세상을 소요케 하는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재세례파가 가진 수많은 장점을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다음 주는 재세례파가 가진 신학적 특징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현욱
책이라면 정신을 못차리는 책벌레이며, 일상 속에 담긴 하나님의 신비를 글로 표현하기 좋아하는 글쟁이 목사다.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이고, <생명의 삶 플러스> 집필자이며 한국컴퓨터선교회 및 여러 기독교 신문과 출판사 서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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