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우십니까
가벼우십니까
  • 성현
  • 승인 2019.09.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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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움의 전성시대다. 빠름과 많음을 선호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가벼움은 가장 사랑받는 가치 중 하나다. 한 손에 들기 편하고 한번에 원하는 서비스가 이뤄지려면 가벼워야 한다. 보관하거나 쌓아둘 필요가 없다. 접속만 하면 음악을 들을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클릭 한 번에 친구를 신청할 수도, 거절할 수도 있다. 문 닫는 시간에 맞춰 서둘러 매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 밤늦게 주문해도 아침이면 문 앞에 제품이 와 있다. 가구도 빌릴 수 있다. 가벼워질수록 부담은 적어지고 편리는 늘어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벼움은 중심에 서지 못했다. 무겁고 오래될수록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격투기의 하이라이트는 대부분 무게가 나가는 헤비급 선수들의 경기였다. 직장 또한 요즘처럼 몇 번의 이직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시간의 무게를 더해가며 퇴사 때까지 한 직장을 다녔다. 무거움은 성실과 실력 있음의 증거였다. 가볍다는 건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는 의미였고, 뿌리내리지 못한 불안정함처럼 여겨졌다.

그러던 가벼움이 어느 날부턴가 변방에서 중심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와 동시에 무거움은 둔하고 낡은, 옛 시대의 언어가 돼버렸다. ‘오래됨’의 관록보다 ‘뜨는’ 동네라는 새로움이 훨씬 매력 있게 다가왔다. 이해하고 용납하는 시간이 포함된 깊은 관계보다, 기호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고 흩어지는 ‘쿨한’ 관계가 더 좋다고 말한다. 일이든, 관계든 가벼운 게 미덕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런 쏠림 현상이 괜찮은 걸까. 프랑스의 철학자 질 리포베츠키는 책 ‘가벼움의 시대’에서 가벼움이 비대해질 때 삶의 성찰과 창조, 윤리적·정치적 책임감 등 다른 본질적인 차원들을 억누를 수 있다며 그 위험성을 경고했다. 우리는 그런 부작용을 이미 경험하고 있다.

복합적으로 검토해야 할 사안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서둘러 명확한 입장과 요점을 내놓으라고 한다. 세월과 함께 깊이를 더해가는 예술가의 행보를 주시하며 그의 고독과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작품을 기다려주기보다 새로운 발상과 콘셉트의 등장에 환호하기 바쁘다.

추억이 깃든 장소를 찾아가 보면, 전혀 다른 장소로 변해 우리를 시간의 미아로 만들어 버린다. 무엇보다 가벼움의 시대는 사람의 얼굴을 모르게 만든다. 집 앞에 놓인 물건이 배송되기까지 수고한 이들의 얼굴도, 자판을 몇 번 두드려 쉽게 올린 글 때문에 삶 전체가 부정당해 고통당하는 이의 얼굴도, 어제 들렀던 편의점에서 일하는 이들의 얼굴도 우리는 모른다. 그렇게 서로를 가볍게 대하며 우리는 점점 존재의 무게를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거움에 지친 이들에게 가벼움은 분명 복음이다. 예수님께서도 무거운 짐을 그만 지고 자신이 주는 가벼운 짐을 지라고 초대하셨다.(마 11:28~30) 전도여행을 나서는 제자들에게도 지팡이 하나와 신만 신고 나서라 하셨다.(막 6:8~9)

율법주의라는 무거운 짐을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그들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셨다.(마 23:3~4) 그러나 정작 예수님은 땀이 핏방울같이 되도록 기도하시고(눅 22:44) 무거운 십자가를 지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 가능한 일임을 아신 까닭이다.(요 12:24)

희생이 빠진 가벼움, 배려를 모르는 가벼움, 역사를 외면한 가벼움은 누군가의 삶을 한없이 무겁게 만든다. 기독교 문화의 렌즈가 초점을 맞출 것은 가벼움을 누리는 풍경 그 자체가 아니다. 무엇이 우리 삶을 무겁게 만드는지, 가볍게 만드는 일에 어떤 어려움이 따르는지, 가벼움을 갖고 무엇을 할 것인지, 가벼움을 못 누리는 사람은 없는지 살피는 일이다. 그리고 기꺼이 그 일을 위해 나선 이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지혜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가벼움의 시대라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너무 무겁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에겐 진짜 가벼움이 필요하다.


성현
서울 신촌에 있는 기독교 영화관 ‘필름포럼’의 대표이며, 주일에는 영화관에서 예배를 드리는 ‘창조의 정원교회’담임목사이다. 장로회신학대학원(M.Div.)과 실천신학대학원(Th.M./예배학 Ph.D.)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기독교영성을 기반으로 삶과 신앙을 잇는 강연과 설교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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