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여성인권 선각자로 서다
기독교 여성인권 선각자로 서다
  • 전정희
  • 승인 2019.09.10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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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메례 전도사가 경성성서학원(서울신대 전신)을 졸업하고 사역한 세종시 부강성결교회. 신실한 기독청년운동가, 교육자였던 그는 남존여비라는 악습과 맞서 싸우다 좌절했다. 부강은 사별한 두 번째 남편 양홍묵의 고향으로 여메례는 양홍묵의 전처 소생 자식을 데리고 살았다.
여메례 전도사가 경성성서학원(서울신대 전신)을 졸업하고 사역한 세종시 부강성결교회. 신실한 기독청년운동가, 교육자였던 그는 남존여비라는 악습과 맞서 싸우다 좌절했다. 부강은 사별한 두 번째 남편 양홍묵의 고향으로 여메례는 양홍묵의 전처 소생 자식을 데리고 살았다.

어찌나 폭우가 쏟아지던지 취재 순례를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지난 8일 세종시 부용면 부강리 경부선 부강역 근처였다. 부강리는 금강을 끼고 있으며 충북 청원군이었으나 지금은 세종특별자치시에 속한다.

그래서일까. 면 단위지만 행정수도답게 생기가 넘쳤다. 여기저기 신축 건물이 올라가고 분양 현수막이 나부낀다. 폭우가 그치고 부강성결교회를 찾아 길을 나섰다. 십자가 첨탑이 보이는 오르막길을 걸으니 대기업 사택이 나타났고 그 사택 단지 언덕 부강성결교회 예배당 벽면에 예수가 어린양을 안고 있는 대형 걸개그림이 훤했다.

기독 신여성의 희망과 좌절

부강교회는 1921년 설립됐다. 그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흔적은 예배당을 마주하고 봤을 때 오른쪽 2m 남짓한 기념비에서 느낄 수 있다.

부강교회 내 여메례 불망비.
부강교회 내 여메례 불망비.

한자와 한글을 섞어 ‘고여미례여사영세불망비(故余미례女史永世不忘碑)’라고 새겨진 기념비 후면에는 그의 일대기가 기록돼 있다. ‘이화학당 1회 졸업생으로 진명여학교를 창립, 교장을 역임 후 서울신학교 교유(敎諭) 겸 사감을 지낸 그는 교육계와 종교계에 공적이 뚜렷한 선구자’라며 ‘그 후 부강에 낙향은거하시어 부강성결교회를 창설하시와 구령사업에 헌신하였기에 이를 영원히 기념하고자 불망비를 세운다’고 돼 있다. 1967년 11월이었다.

‘여미례’는 기독교 사학계에서 여메례로 통용된다. 기독교역사학자 이덕주 교수에 따르면 그는 두 번의 혼인을 했는데 황현모라는 사람과의 첫 결혼 때는 황메례, 양홍묵과 재혼했을 때는 양메례로 불렸다.

여메례 (1874~1933)
여메례 (1874~1933)

여메례는 경남 창녕 출신으로 메리 스크랜턴(한국명 시란돈·1832~1909) 선교사의 양녀가 됐다. 메리는 이화학당 설립자로 한국 근대 여성 교육의 효시로 불린다. 감리회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1856~1922)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여메례가 어떤 과정을 통해 양녀가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한국여성사: 개화기-1945’에는 그의 부모가 딸이 자신들과 함께 지내면 단명한다는 점쟁이 말을 듣고 양녀로 보냈다고 기록됐다. 그리하여 여메례는 12세 이후 메리의 품 안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

여메례는 경남 창녕 출신으로 메리 스크랜턴(한국명 시란돈·1832~1909) 선교사의 양녀가 됐다. 메리는 이화학당 설립자로 한국 근대 여성 교육의 효시로 불린다. 감리회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1856~1922)의 어머니이기도 하다.여메례가 어떤 과정을 통해 양녀가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한국여성사: 개화기-1945’에는 그의 부모가 딸이 자신들과 함께 지내면 단명한다는 점쟁이 말을 듣고 양녀로 보냈다고 기록됐다. 그리하여 여메례는 12세 이후 메리의 품 안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
이화학당 출신 신여성 여메례 노수잔 박에스더(왼쪽부터).

스크랜턴 모자는 1886년 ‘시병원’을 설립하고 이후 이화학당 구내에 부인과 전문병원 보구여관(이화의료원 전신) 등을 열어 교육·의료 선교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여메례 연구자 윤정란은 ‘1888년 9월 세 명의 한국 여성이 세례를 받았는데 이때 여성들이 각기 메리, 마르다, 샬롬이었다’고 했다. 그 메리가 여메례이다.

여메례는 10대 때 이화학당과 보구여관(현 서울 이화여고)을 마당 삼아 살았다.
 

학교 및 병원을 운영했던 옛 이화학당과 그 후신 서울 정동 이화여고 현재 모습(아래 사진).
학교 및 병원을 운영했던 옛 이화학당과 그 후신 서울 정동 이화여고 현재 모습(아래 사진).

1899년 보구여관 여의사 로제타 홀(1865~1951)이 미국 선교부에 보낸 연차보고서에는 자신이 너무 분주해 여메례를 비롯해 매기, 마르다, 그레이스 등에게 간호학 강의를 계속해줄 시간이 없음을 걱정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여메례는 이해에 황씨와 결혼했다. 결혼 3개월 만에 미국 유학을 떠난 남편은 그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여메례의 직업은 전도부인 및 간호요원이었다.

여메례는 앞서 1897년 서울에서 개최된 미감리회 한국선교연회의 결정에 따라 엡윗청년회(대한중앙청년회)가 조직됐을 때 위원으로 추대됐다. 이듬해에는 한국 기독교 최초의 여성단체 격인 조이스청년회의 부회장이 된다. 한국인으로서 첫 여성단체 임원이었다.

1898년 ‘대한그리스도인회보’는 여메례가 조이스청년회 업무를 소개하는 내용을 실었다. ‘청년회 인제국이라는 부서는 하나님 뜻을 기쁘게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노인과 환자, 나그네 등을 돌보며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소임을 다한다’고 했다. 엡윗청년회와 조이스청년회는 당시 ‘남녀를 같은 학문으로 동등하게 대접함이 가하다’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가질 정도였다. 여메례가 여성 인권, 교회 및 시국 문제 등을 다룰 수 있는 여성 지도자로 성장하는 배경이 됐음을 윤정란 연구자가 밝히고 있다.

여메례는 1900년 4월 15일 부활주일 강연회를 통해 미 감리회 해외선교회의가 세계 각국에서 여성 선교를 위해 애쓰는 것을 축하하며 “대한의 여성들도 동심 협력하면 외국 부인들과 같이 못 할 일이 없을 것이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청년 단체활동은 친일 감독 해리스와 조선총독부 이토 통감에 의해 1906년 단체가 해산되며 중지되고 만다.

여메례가 교사 및 교장으로 있던 시절의 진명여학교 두루마기 교복.
여메례가 교사 및 교장으로 있던 시절의 진명여학교 두루마기 교복.

그럼에도 여메례는 ‘국가의 성쇠는 여성의 지식과 학문의 수준’이라며 스크랜턴 박사가 경영하던 병원 건물 하나를 얻어 20여명의 여아를 가르치는데 그중 하나가 대한제국 군무총장 엄준원의 딸이었고 엄준원은 엄귀비(고종 후궁)의 남동생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엄귀비는 서울 창성동에 진명여학교를 설립하는데 이를 여메례가 주도하면서 기독교교육을 바탕으로 삼게 한다. 하지만 여메례는 ‘한일부인회’ ‘일본애국부인회’ 등과 밀접한 관계를 해야 했고 그것이 기독교 여성운동의 선각자 여메례에게 독이 됐다.

온막교회 이창기의 순교와 여메례

양홍묵과 관련 깊은 경북 청도 온막교회.
양홍묵과 관련 깊은 경북 청도 온막교회.

부강교회를 떠나 이튿날 경북 청도 온막교회(1906년 설립)를 찾았다. 1908년 5월 온막교회 초대교인 이창기가 새벽기도회를 다녀오다 일본 순사에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청도군수 양홍묵(1866~?)은 야소교인 이창기의 순교를 두고 ‘비명횡사’했다며 상부에 보고를 올렸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1895)으로 그곳 청도에도 의병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창기는 주둔 일경들에게 “예수를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고 복음을 전했다. 이를 통역관이 “천황을 욕하는 것 같다”고 잘못 전해 참살당한 것이다.

이 기독교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배재학당 출신 양홍묵은 못 본 척해버렸다. 협성회 멤버였고 주시경 신흥우 이승만 윤치호 등과 교유했으며 매일신문 사장을 지냈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던 엘리트는 나라가 패망의 길로 접어들자 친일파가 됐다. 청도의 향토사가 김진태 장로는 “양홍묵이 이창기 사건을 선교사 등에 호소해 신원했어야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여메례 남편이자 청도군수였던 양홍묵의 기독교인 타살 보고 문서.
여메례 남편이자 청도군수였던 양홍묵의 기독교인 타살 보고 문서.

여메례는 감리회 청년회가 해산되고 진명여학교 교육 현장에서도 밀려난 뒤 바로 이 양홍묵과 재혼했다. 양메례가 된 것이다. 양홍묵이 죽자 그의 고향 부강리에서 전도사가 돼 부강성결교회를 이끌었다. 청주교회와 조치원교회 전도사로도 재직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 자기 성찰이 부족했던 엘리트 부부의 씁쓸한 말년이었다. 하지만 여메례는 한 세기를 앞서간 한국 근대 기독여성인권운동가로 연구돼야 할 인물임이 분명하다.



전정희
국민일보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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