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히 츠빙글리의 생애
울리히 츠빙글리의 생애
  • 정현욱
  • 승인 2019.09.04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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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를 갖기 위해 그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의 내부에 자리 잡은 진정한 심성이 하나님의 율법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더 인간의 내면적 존재를 즐겁게 할 수 있는 법률이나 말씀이 없을 것이다.”

1. 들어가면서

종교개혁은 루터 한 사람에 의해 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루터를 기꺼이 사용하셔서 종교개혁의 막을 올리고 추진해 나갈수록 상황을 섭리하시고, 사람들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루터만 종교개혁을 시작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루터처럼 전면에 나오지 못했지만, 종교개혁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친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중의 한 명이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였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루터보다 먼저, 루터보다 더욱 진보적인 종교개혁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루터가 중세 신학과 종교개혁 중간 지점에 걸쳐 있다면 츠빙글리는 확연히 종교개혁 사상의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감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신학적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루터와 츠빙글리가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된 성만찬 논쟁에서 그것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존 칼뱅이 신학적으로 완숙한 단계에 이를 수 있었던 이유는 루터의 감성적 측면의 성경 이해와 더불어 츠빙글리의 상징론적 성경관이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츠빙글리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간략한 생애

루터가 탯줄을 끊은 지 두 달이 되지 않은 1484년 1월 1일, 스위스의 산촌에서 츠빙글리는 세상에 얼굴을 내밉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토겐부르크(Toggenburg) 지방의 빌트하우스(Wildhaus)였습니다. 이곳은 취리히에서 64km 떨어진 곳이며, 해발 914m에 이르는 높은 산지였습니다. 농부의 집이었지만 마을 행정관(chief magistrate)을 역임했던 아버지 후원으로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독립심이 강하고 국가에 대한 사랑 남달랐다고 합니다. 국가에 대한 이해하는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을 이어받아 교회와 국가는 서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루터와는 사뭇 다른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츠빙글리가 보기에 교회와 국가는 불가분의 관계로 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자신이 직접 군인으로서 전쟁에 참여한 경험,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도 전쟁에 참여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스위스 연방에 대한 간곡한 경고>(1523)를 통해 국가의 통합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신앙과 학문에도 대단히 열정적이어서 자신이 뭔가를 시작하면 극도로 집중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장점이기도 한 이 성격은 초기의 스위스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지만 후에는 루터와 격하게 논쟁하고 갈라서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츠빙글리의 첫 번째 교사는 원래 빌트하우스의 사제였던 바르톨로뮤(Bartholomeu)였습니다. 그는 츠빙글리의 삼촌이었고, 빌트하우스를 떠나 베젠(Wesen) 의 수석 사제로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명석했던 츠빙글리는 다방면에서 재능이 있고 호기심이 많아 가르치는 대로 잘 받아들였습니다. 르네상스 운동에 관심을 갖고 공부했으며, 르네상스 운동이 어떻게 중세교회를 무너뜨렸는가 살폈습니다. 1494년 츠빙글리는 10세의 나이로 바젤(Basel)의 성 데오도르(St. Theodore)학교에 입학합니다. 그곳에서 삼촌과 함께 일했으며 먼 친척이던 그레고르 뷘츨리(Gregory Bünzli)라는 교사를 만나게 됩니다. 라틴어, 변증학, 음악 등을 공부하며 기본적인 인문학적 소양과 앞으로 츠빙글리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음악성을 발견하는 계기가 됩니다. 바젤은 에라스무스가 자신이 편집한 신약성경을 출판한 곳으로 인문학적 성향이 매우 강한 도시였습니다. 츠빙글리의 공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2년 뒤인 1496(또는 1497)년에 베른으로 옮겨 다시 공부하게 됩니다. 베른에서는 하인리히 뵐플린과 루풀루스라는 교사를 통해 르네상스 학습 방법론에 대해 깊이 있게 배우면서 학문적 능력을 배양하는 중요한 시간을 갖습니다. 베른에서 츠빙글리는 음악에 매료되기도 합니다. 한때는 도미니카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친척의 만류로 1498년경 비엔나로 옮겨 2년을 체류하다 바젤 대학에 입학 허가를 요청합니다.

갑작스러운 비엔나로의 이동은 츠빙글리에게 생각할 기회를 준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적 기록이 명확하지 않지만, 츠빙글리는 입학 허가는 2년을 더 기다려 1502년 봄에 납니다. 그의 나이 만 18세였습니다. 그는 인문학 과정에 들어가 본격적인 신학의 길을 걷게 됩니다. 신학이 주된 공부는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그곳에서 스콜라주의적 신학 방법론을 배우게 됩니다. 체류하면서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성 마틴 학교에서 강의 합니다. 1504년에 학사 과정을 졸업하고, 2년 뒤인 1506년 문학 석사 학위를 마칩니다. 학위를 마친 후 토마스 비텐바흐Thomas Wittenbach)의 강의 페에트로 롬바르도의 <명제집>에 대한 강의를 수강하며 공부에 더욱 매진합니다. 비텐바흐는 에라스무스의 비평적 인문학을 추구했기 때문에 루터처럼 츠빙글리도 에라스무스의 인문학적 학습법을 습득하게 됩니다. 스콜라철학에 빠져있던 중세 시대에 에라스무스의 방법론은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비텐바흐는 츠빙글리의 신학을 정립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츠빙글리의 신학 핵심인 ‘성경의 수위권’과 ‘은총과 신앙에 의한 칭의’ 개념은 비텐바흐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아마 당시에는 이것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506년 사제 서품을 받고 글라구스(Glarus) 교구의 청빙을 받아 사역하게 됩니다. 교구가 커서 분주한 일상이 지속하였지만 성실하게 일한 덕에 개인적인 학문과 신학 연구를 병행할 수 있었습니다. 글라구스에 있는 동안 츠빙글리는 헬라어에 능통하게 됩니다. 당시 스위스 지방의 사제들 대부분이 무시하고 신약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어보지 못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츠빙글리의 성경에 대한 집요한 관심은 앞으로 전개될 그의 개혁 운동에 날개를 달아 주었습니다. 글라구스에 있는 동안 용병제도에 눈을 뜨게 됩니다. 스위스인들은 용맹하다는 소문이 있어 많은 나라에서 용병 요청을 받았습니다. 다른 나라 용병에 비해 높은 가격을 부를 수 있었고, 좋은 수입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용병제도는 부를 가져다주는 대신 심각한 도덕적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교구 내의 신도들이 피정복지를 약탈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충격을 받습니다. 용병제도는 사회적이며 윤리적인 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큰 죄악’으로 단죄하게 됩니다. 단지 돈 때문에 생명을 로마와 프랑스를 위해 바치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1513년과 1515년 교황 치하의 장려금을 받습니다. 츠빙글리는 장려금을 고전과 신학 공부에 투자했습니다. 많은 도서를 구입하고 최신 작품들을 섭렵해 나갑니다. 에라스무스와 교제하며 인문주의에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헬라어에 관심이 있는 이들을 위해 성경 원어 공부를 시켰고, 자신도 신약 성경을 원어로 직접 읽으며 성경을 더욱 깊이 파고 들어갑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용병제도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고, 많은 문제가 용병제도로 인해 일어났다고 보았습니다. 

1516년 아인지델른(Einsiedeln)에서 대중 목회자로 청빙 되어 가게 됩니다. 아인지델른은 츠빙글리에게 좋은 조건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아인지델른은 취리히에서 남동쪽으로 32km로 떨어진 작은 마을에 불과했지만 ‘전대사’이며 천사의 봉헌으로 된 성모 마리아 상(Black Image of the Virgin Mary)이 있는 순례지였습니다. 9월 14일 주일에 축제가 있었고, 주간 거행되었습니다. 츠빙글리는 집중적으로 예배와 설교를 맡아 하게 됩니다. 명료하고 감동적인 츠빙글리의 설교는 참석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의 명성은 점점 퍼지게 됩니다. 설교 외에는 많은 여유 시간이 주어져 교부 문헌과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지역 수도원에 도서관이 있었고, 츠빙글리의 친구들은 기꺼이 책을 구입해 보내주었습니다. 1518년 즈음에 츠빙글리는 루터가 도달했던 깨달음에 거의 근접하기에 이릅니다. 1517년 10월 31일은 루터가 95개조를 발표한 날입니다. 츠빙글리 역시 교회의 문제들에 대해 심각한 의구심을 서서히 갖게 됩니다. 그는 순례와 선행 등이 구원과 관련 있다는 기존의 주장을 반대하는 설교를 했고, 기독교의 얼굴을 한 미신에 대한 공격, 교회 성직자들의 부정부패를 지적했습니다. 

츠빙글리는 점점 자신이 변해가고 있음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정도 교회 개혁의 필요성은 느꼈지만, 가톨릭교회가 주는 안정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츠빙글리가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취리히시는 먼저 츠빙글리가 과도하게 음악을 좋아해 경박할 수 있다는 오해를 했습니다. 어린 시절 음악에 매료된 츠빙글리는 하프, 바이올린, 플루트, 코렛 등을 연주할 뿐 아니라 작곡가의 재능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여자 문제로 좋지 않은 소문이 일어나 있었습니다. 츠빙글리는 다윗도 음악에 능했다면서 음악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나 여자 문제는 자신의 잘못임을 솔직히 고백하고 피하지 않았습니다. 츠빙글리의 편지를 접한 참사원들은 1518년 12월 11일, 회의를 열고 츠빙글리를 청빙하기로 결정합니다. 한 명의 후보가 더 있었는데 그는 첩과 6명의 자녀를 두었던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결국 츠빙글리는 1518년 12월 27일 아인지델른을 떠나 취리히(Zürich)로 이사합니다. 이후, 취리히는 츠빙글리의 삶, 목회, 개혁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많은 사례비도, 발언권도 없었지만, 정기적 설교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곳에서 성경강해를 설교시간마다 하게 됩니다. 츠빙글리는 얼마 가지 않아 취리히 신자들의 존경을 받기에 이릅니다. 누구보다 명확하고 강력한 설교, 당시 사제들과 차원적으로 다른 경건과 도덕성, 그동안 쌓아온 학식이 츠빙글리는 돋보이게 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전 중세교회 사제들에게서 보지 못한 모습은 취리히 시민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1519년 취리히는 흑사병에 점령당합니다. 그는 다른 곳으로 피난 가지 않고 환자들과 함께했습니다. 자신도 흑사병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가 점점 회복해갔습니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아끼지 않고 돌본 츠빙글리를 존중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츠빙글리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점점 개혁의 토양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당시 칼 5세와 교전 중이던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가 스위스 연맹 (Swiss Confederation)에게 파병 요청을 합니다. 연합국을 이루고 있던 스위스의 모든 캔톤(canton), 즉 자치주들은 병사를 파견합니다. 오직 취리히 만이 파견을 거부합니다. 프란시스 1세를 지원하던 교황은 즉각 취리히에 교황청에 복종해야 한다며 파병을 강요합니다. 이 사건은 츠빙글리에게 교황에 대한 인식을 전환시킨 사건이었습니다. 단순한 교회 개혁의 차원을 넘어 중세교회 자체가 갖는 구조적 악의 모순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이후, 부정부패와 미신에 향했던 비판의 칼날은 비판의 초점이 교황에게로 옮겨져 갑니다. 이때를 츠빙글리가 진정한 종교개혁가로서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서로 다른 상황 속에서 루터와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의 두 기둥이 되었던 것입니다.

1522년 츠빙글리는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며 바젤의 오이코람파디우스(Oecolampadius)와 서신 교환을 시작합니다. 1521년 루터는 칼 5세의 부름으로 윔스제국회의에서 자신의 신학을 변호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바람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던 시기에 츠빙글리도 취리히에서 또 다른 개혁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에라스무스와 관계도 루터와 비슷한 과정을 밟게 됩니다. 친밀했던 에라스무스와 관계도 시간이 지나면서 신학적인 차이점이 드러나면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에라스무스는 사회를 비판하고 풍자할 뿐 실질적인 개혁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1523년 에라스무스와의 교제는 완전히 끊어지게 됩니다.

1523년 츠빙글리는 개혁을 반대하는 교황파와 공회 앞에서 공개토론을 하게 됩니다. 67개의 개혁제안을 제출함으로 공회는 츠빙글리의 입장을 지지함으로 취리히는 공식적인 개혁에 동참하게 됩니다. 67조의 핵심은 중세교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개혁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교부들의 해석 오류를 언급하고, 교황을 교부들의 권위와 동등하게 보는 것은 분명한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교황은 적그리스도이며, 교부들 역시 사람이기에 오류를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인간의 이성은 오류가 있으며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갖가지 가르침과 규범을 의무화한 교황청의 강요도 잘못이라고 지적하며 마땅히 거부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츠빙글리는 ‘오직 성경’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취리히의 개혁은 급했고 단호했습니다. 교회 안의 오르간은 부서졌고 성화도 제거되었으며, 성직자들의 결혼도 허락되었습니다. 미사는 희생제가 아닌 ‘기억 예식’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츠빙글리의 이러한 개혁은 루터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진보적이며, 현대의 예배관과 가장 근접한 것입니다. 츠빙글리 자신도 1524년에는 과부였던 안나 라인하르트(Anna Reinhard)와 결혼합니다. 그녀에게 게롤트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를 위해 <기독교 청소년 교육>을 저술합니다. 이즈음을 기점으로 츠빙글리는 본격적인 개혁을 위한 방대한 저술 작업을 시작합니다. 청소년 교육과 주석, 세례와 성만찬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합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츠빙글리는 재세례파를 반대하고, 루터의 성만찬을 비판합니다. 상징설을 주장했던 츠빙글리의 입장에서 볼 때 루터의 공재설은 중세의 화체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1530~1531년에는 <반재세례파의 속임수에 대한 평판>과 <신앙과 이성>, <기독교 신앙 해설>을 출간합니다. 츠빙글리는 분명 루터보다 개혁적이고 중요한 논제를 가지고 논문을 작성했지만 여러 면에서 완성도가 낮았고, 오류도 종종 보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츠빙글리의 설교는 강도가 높아갔습니다. 철저히 성경에 근거하여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 것들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비판했습니다. 예를 들어 성직자의 독신제도는 성경에서 권하지도 않고, 전혀 근거하지 않기 때문에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겉으로는 독신이지만 실제로 독신으로 살아가는 신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릇된 성직자의 독신제도는 성적타락과 불법을 자행하도록 만드는 구실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금식과 금욕의 문제도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고, 근거 없는 것으로 일축합니다. 그로 인해 일부 교인들이 사순절 기간에 함께 모여 소시지를 나누어 먹는 일이 일어납니다. 츠빙글리는 기꺼이 그들을 변호했고, 문제는 일단락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을 고발했던 콘스탄츠 부주교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문제가 커지자 아드리안 6세는 츠빙글리를 회유하며 잠잠하기를 요청합니다. 츠빙글리는 성경에 기록된 것을 말할 뿐이라면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시의회가 나서서 츠빙글리와 감독의 대표자들을 모아 공개 토론의 장을 마련하여 여론을 잠재우려 합니다. 츠빙글리는 자신의 주장이 철저히 성경에 근거했다며 중요한 요점들을 정리해 변증합니다. 그러나 감독의 대표들은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고, 츠빙글리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지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츠빙글리의 주장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이 더욱 확고해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시의회는 츠빙글리의 손을 들어 주었고, 콘스탄츠 주교구와 결별하게 됩니다. 이것은 취리히가 로마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독립적인 취리히만의 교회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때부터 츠빙글리 주도하에 취리히의 종교개혁을 탄력을 받게 됩니다.

1524년부터 본격적인 개혁의 바람이 일기 시작합니다. 취리히를 벗어나 주변 도시들에도 번져나갔습니다. 츠빙글리의 개혁에 동참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졌고,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개혁을 반대하는 이들도 점차 스스로 힘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두 세력이 긴장 상태에 돌입하게 됩니다. 반대자들은 에크의 글로 반박했고, 주변의 반대자들을 끌어모았습니다. 츠빙글리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개혁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중심 세력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루터와의 성만찬 문제로 스위스는 고립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츠빙글리는 연합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기독교시민동맹을 설립합니다. 1529년 6월, 가톨릭 주들과 대립했고, 제1차 카펠 평화 협정에서 논쟁을 하지만 복음주의 진영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하지만 그해 슈파이어 의회가 모든 복음적 교육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 일로 츠빙글리는 루터와의 연합을 추구하게 됩니다. 1529년 10월 2-4일 독일의 마르부르크에서 만나 두 대표는 모든 부분에서 합의를 이룸으로 완성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성만찬에 있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어 서로 대립하게 됩니다. 결국 두 사람은 결별하게 되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1531년 10월, 5개의 카톨릭 캔톤(州)들이 연합하여 취리히를 공격합니다. 취리히 사람들은 아직 준비가 안 됐고, 결국 10월 11일 카펠 전투에서 패하게 됩니다. 츠빙글리도 이 전쟁에 참여하여 죽음을 맞이합니다. 츠빙글리는 개혁파에 속한 캔톤들에게 연합과 선공격을 주장했지만 어느 곳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취리히는 독립적으로 가톨릭 캔톤과의 싸움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결과는 비참했고, 스위스 종교개혁은 멀리 떠나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마무리 되고 한 달이 채 안 되어 캐펠 화의를 통해 각 캔톤들은 자신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는 문서에 사인을 하게 됩니다. 개혁을 추구하고 옹호한 이들은 개혁을 받아들이는 캔톤으로 이주하고, 가톨릭을 옹호한 이들은 가톨릭을 선택한 캔톤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결국 연방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극명한 선이 그어짐으로 적과의 동침과 같은 긴장감을 갖는 스위스 연합이 되고 말았습니다.

3. 나가면서

츠빙글리의 생애는 루터에 비해 굵고 짧았습니다. 루터와 약간의 교류는 있었지만 거의 독립적으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루터처럼 사색적이고 고뇌하는 성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의 색채도 적지 않게 달랐습니다. 그러나 루터보다 더 철저했고, 단호했으며, 명징했습니다.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루터보다 치밀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철저히 성경에 근거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루터를 앞서간 인물이었습니다. ‘십자가 신학’과 ‘두 왕국론’에서 보이듯, 루터는 중세적 신비와 종교개혁자들의 종교적 세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두 왕국이 아닌 하나님 나라가 역사 속에서 구현되어 나타나야 한다는 하나님 주권 사상의 기초가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용병제도는 반대했지만, 기독교 국가로서 군인은 하나님의 대리인의 역할 수 있다는 것이 츠빙글리의 생각이었습니다. 루터가 세속 권세를 마지못해 인정했다면 츠빙글리의 경우는 ‘시민’으로서 당연히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 보다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국가와 교회의 완전한 분리와 참여 불가의 관점에서 바라본 재침례파와 전혀 다른 국가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츠빙글리의 중요한 저작과 논문들을 살펴보면서 칼뱅을 통해 계승될 츠빙글리의 개혁사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현욱
책이라면 정신을 못차리는 책벌레이며, 일상 속에 담긴 하나님의 신비를 글로 표현하기 좋아하는 글쟁이 목사다.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이고, <생명의 삶 플러스> 집필자이며 한국컴퓨터선교회 및 여러 기독교 신문과 출판사 서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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