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만이 얼굴을 가질 수 있다
인간만이 얼굴을 가질 수 있다
  • 심정아
  • 승인 2019.08.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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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아, 자화상_장미 그림자, 연필 드로잉 위에 그림자 투사
심정아, 자화상_장미 그림자, 연필 드로잉 위에 그림자 투사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공기의 느낌, 혹은 어떤 소리로부터 시작되기도 합니다. 피부에 닿는 공기의 온도, 촉감, 물기, 어떤 향,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던 생명의 따스함, 앞으로 한 걸음 내딛기 전에 느껴지던 몸의 무게. 그리고, 천천히 페이드인 되며 들려오기 시작하던 어떤 소리… 
  
어느 겨울날의 느지막한 아침, 잠이 덜 깬 채로 부엌으로 들어섰습니다. 바닥의 차가운 냉기가 맨발에 닿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한쪽에 놓여 있던 슬리퍼를 찾아 신습니다. 늘 무언가 만들어지고 누군가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의 부엌.  
손질한 생선에서 풍겨오던 바다 비린내, 막 잘린 파의 향이 공기 속에 뒤섞여 있고, 끓고 있는 냄비 속에서 투명해진 무가 향긋한 수증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야채의 몸 위에서 조금 시간을 지체하다가 도마 위로 이내 툭 떨어지는, 둔탁한 칼질 소리. 어머니는 뒷모습인 채로 서서 당근을 썰고 계십니다. 

아직 채 6살이 되지 않은 저는 그녀의 치맛자락 옆으로 다가가 도마와 냄비 속을 번갈아 쳐다보며 서 있습니다. 무채색이던 냄비 속으로 붉은 당근 조각들이 퐁당 몸을 던지고, 잠시 후 생선 토막 몇 개도 슬그머니 자리를 잡습니다. 
 “엄마, 생선 얼굴은 언제 넣어?” 툭 던진 저의 질문에 그녀의 눈이 잠시 동그래집니다. 어머니는 눈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시며, 헝클어져 있던 저의 머리카락들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생선은 머리라고 부르지 얼굴이라고 부르면 안 돼.” 
“… 왜?” 
그녀가 무어라 대답해 주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까마득하게 오래된 기억 속, 수줍음이 많고 의기소침한 편이던 저는, 그날 무언지 모를 미안한 감정에 사로잡혔던 것 같기도 하고 또 며칠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겨우내 밤이면 무릎이 아프고, 깨고 나면 기억이 나지 않는 악몽을 반복해서 꾸는 동안, 문지방 위로 포근한 햇살이 넘어오기 시작하는 봄이 되자 저의 팔과 다리는 잠옷을 삐져나와 길게 자라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어린 저는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을 그에 걸맞은 단어로 정성껏 불러주고 싶어 했지만, 하루하루가 서툰 실수들과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라 어딘지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어린 시절 대부분의 기억이 밝고 따스한 것은, 아침마다 잠이 덜 깬 채로 들어서던 어머니의 부엌, 변함없이 그곳에서 무언가 따스하고 좋은 것을 만들고 계시던 어머니… 그런 감사한 장소들과 사람들이 기억의 한쪽에서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 아닌가 싶어요.

어찌 되었든, 그날 저는 인간만이 얼굴을 가질 수 있다는 꽤 무겁고도 심각한 비밀을 알게 된 셈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대부분 얼굴이 아니라 머리를 갖는다는, 뜻밖의 사실도.
 

심정아, 자화상, 연필 드로잉
심정아, 자화상, 연필 드로잉

심정아
드로잉, 오브제 설치, 사진, 영상, 퍼포먼스로 작업하는 예술가
울고 싶어도 제대로 울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다.
뉴욕의 Parsons 와 Pratt대학원을 졸업, 홍익대에서 “Broken Beauty”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작가홈피 www.jungahsh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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