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들, 그리고 마음 연습
얼굴들, 그리고 마음 연습
  • 심정아
  • 승인 2019.08.14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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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아, 얼굴들_베니스의 가면 상점, 흑백사진
심정아, 얼굴들_베니스의 가면 상점, 흑백사진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절을 기록한 자서전 같은 책, <말테의 수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많지만, 얼굴들은 더 많다. 누구나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얼굴을 몇 년씩이나 쓰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 얼굴은 써서 닳고, 더러워지고, 주름이 잡히고, 여행 중에 끼고 다닌 장갑처럼 늘어나기도 한다. 그들은 검소하고 단순한 사람들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무척 빠르게 얼굴을 차례차례 바꿔 쓰면서, 그것들이 다 닳아 없어지게 한다. 그들은 얼굴을 아끼는 데에 익숙하지 않다. 그들의 마지막 얼굴은 일주일 만에 다 닳아 구멍이 생기고, 여러 군데가 종잇장처럼 얇아진다. 그래서 점점 얼굴도 아닌 바탕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들은 그것을 쓰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여인, 그 여인… 그녀는 완전히 자기 안에 빠져 있었지. 앞으로 몸을 숙여 구석에 얼굴을 묻고. 노트르담 데상트 거리 모퉁이에서 였다. 나는 그녀가 보이자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 어쩌면 그들에게 무언가 떠오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러나 거리가 너무나 텅 비어 있었다. 거리의 공허는 심심하던 차에 내 발 밑의 걸음걸이를 낚아채더니 이리저리 다니며, 나막신을 신었을 때처럼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그 여인은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손에서 떼어 냈는데, 그 동작이 얼마나 빠르고 급했던지, 그녀의 얼굴이 두 손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움푹한 형태를. 시선을 그 두 손에만 두고, 거기서 떨어져 나간 것은 보지 않으려니, 너무나 힘들었다. 나는 ‘한 얼굴의 속’을 보기가 무서웠다. 

어떤 글들은 문득 일상의 강물 속에서 반짝이는 은색 물고기처럼 박차고 올라와, 다시 그 글을 꺼내어 읽게 만들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이 글이 그런 글인 것 같아요. 
릴케는 예기치 못하던 일상의 우연한 공간에서 한 가난한 여인의 얼굴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는 무방비인 채로, 한 얼굴의 관람자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가 마주하기 두려워했던 ‘한 얼굴의 속‘은 어떤 얼굴이었을까요? 어쩌면 릴케 자신의 얼굴, 그리고 저의 얼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우리가 매일 오가는 어떤 거리, 어떤 장소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물결이 흘러가고 흘러들어오는 강남역 지하철 입구, 계단 한복판에 그녀가 앉아있었습니다. 자그마한 플라스틱 통 안에 소박한 꽃다발들을 빽빽이 꽂아 놓고 자판을 벌이고 있는 그녀는, 생생한 빛깔의 꽃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늙고 남루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누추함이 그녀를 쉽게 지나치지 못하도록 하는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파마한 후 한 번도 빗질을 한 적이 없어 보이는 부스스한 머리는 대부분 하얗게 세어 있었고, 주름이 깊게 파인 얼굴은 피곤함에 지친 탓인지 퉁퉁 부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녀를 만난 것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커다란 반창고가 붙어 있던 그녀의 코였습니다. 코를 다 덮을 만큼 상하로 길게 자리하고 있는 반창고 밑으로 도무지 코의 높이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괴상한 모습이 그녀를 더욱 아파 보이게 했기 때문에, 갑자기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황망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엉거주춤 서 있던 저와 눈을 맞추고 아무 표정 없이 한 마디를 툭 던집니다. “꽃 사가요.“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저녁 7시. 그녀의 ‘꽃 통’은 선택받지 못한 꽃다발들로 여전히 빽빽하고.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속에서 종일 사람들의 물결이 오고 가는 동안 차가운 바닥에 조약돌처럼 동그마니 앉아 초라한 ‘꽃 통’을 지키고 있었을 그녀의 마음이 읽히는 것 같았습니다. 
“이건 얼마예요?” 노란 프리지어를 가리키며 곁으로 쪼그리고 앉아 가방 속으로 손을 더듬어 지갑을 찾는 저에게, “이건 선물용..!” 하며, 프리지어 두세 송이에 안개꽃을 섞어 만든 작은 꽃다발을 자랑스럽다는 듯 가리킵니다. 그런 그녀의 눈에서 따스한 온기가 잠시 머물다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에게 건네받은 꽃다발을 손에 들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숙연해진 저는, 어두워진 밤거리를 일부러 정성껏, 느릿느릿, 걸어보았습니다.
 
봄꽃과 함께 걷기.. 마음 연습…
 

 


심정아
드로잉, 오브제 설치, 사진, 영상, 퍼포먼스로 작업하는 예술가
울고 싶어도 제대로 울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다.
뉴욕의 Parsons 와 Pratt대학원을 졸업, 홍익대에서 “Broken Beauty”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작가홈피 www.jungahsh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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