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지 섭취 사건과 취리히의 종교개혁
소시지 섭취 사건과 취리히의 종교개혁
  • 황희상
  • 승인 2019.08.01 1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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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지 탐방은 이제 스위스로 넘어간다. 그동안 종교개혁자들이 힘들게 버텨오던 곳을 주로 돌아보았다면, 지금부터는 종교개혁이 비교적 찬란하게 꽃을 피웠던 곳들을 방문하면서 그들의 유산을 생각해볼 것이다. 스위스에서는 세 도시를 찾아간다.

모듈 1. 이탈리아 : 로마, 바티칸, 폼페이
모듈 2. 체코/독일 : 프라하, 따보르 / 비텐베르크, 보름스, 바르트부르크, 하이델베르크
모듈 3. 프랑스/스위스 : 파리, 누와용, 상티, 라로셸, 스트라스부르 / 취리히, 바젤, 제네바
모듈 4. 영국 : 런던, 에든버러, 세인트앤드루스

스위스 종교개혁의 중심지 취리히

스위스에서 가장 큰 도시. 길쭉한 호수의 한쪽 끄트머리를 ㄷ자 형태로 품고 있는 물의 도시. 취리히는 스위스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활동한 유명한 종교개혁자는 츠빙글리와 불링거이다. 특히 루터와 동갑내기였던 츠빙글리는 초기 종교개혁의 역사에 있어서 루터만큼의 인지도와 중요성을 가진 인물이다. 그 역시 ‘성경을 읽다가’ 복음을 발견하고,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그런데 그의 초기 종교개혁과 관련된 일화로는 특이하게도 ‘소시지’ 사건이 언급된다. 종교개혁과 소시지라, 얼른 잘 연결이 되지 않을 듯하다.

1522년 사순절 금식 기간에 열두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소시지를 먹어버린’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의 불필요한 규례에 저항하는 의미로 이런 행동을 한 것인데, 당연히 로마 카톨릭은 사순절 음식 규례를 어긴 자들을 처벌하려고 했다. 이때, 사제였던 츠빙글리는 사순절에 육식을 금하는 것에 성경적 근거가 없고 하나님 주신 음식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고 반박하며 소시지를 먹은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두둔했다. 이 사소해 보이는 사건이 취리히 종교개혁의 시작점이 되었다니 흥미롭다.

필자는 2003년과 2017년, 두 번 취리히에 방문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도시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지 탐방팀이 꼭 봐야 할 다섯 곳을 꼽는다면 다음과 같다. (지도에 번호를 표시했다.)

➀츠빙글리 동상/ ➁그로스뮌스터/ ➂프라우뮌스터/ ➃성 베드로 교회/ ➄펠릭스 만츠 순교지
➀츠빙글리 동상/ ➁그로스뮌스터/ ➂프라우뮌스터/ ➃성 베드로 교회/ ➄펠릭스 만츠 순교지

 

1. 츠빙글리 동상(기념비)

가장 먼저 츠빙글리를 만나러 가자. 그로스뮌스터 가기 전에 다리 건너 바로 오른쪽으로 잠깐 돌아가면 작은 예배당(바서 교회) 뒤에 츠빙글리 동상이 있다. 며칠째 답사를 하다 보면 이제 이런 동상은 식상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를 하나 풀어보자. 츠빙글리 동상을 자세히 살펴보자. 츠빙글리가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앞에 보이는 것은 긴 칼이다. 종교개혁자가 칼을 쥐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왜 칼을 쥐고 있을까? 중세 취리히는 경제적으로 로마에 예속되어 있었다. 당시 교황청은 수비대로 스위스 용병을 썼다. 산업기반이 열악한 알프스 북부의 취리히는 남자들이 용병으로 벌어온 돈으로 온 도시가 먹고살았다. 그런데 취리히가 종교개혁의 물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자, 로마는 더 이상 이들을 용병으로 믿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로마의 눈치를 봐야 할 스위스의 다른 도시들은 연합군을 조직해서 취리히를 철저히 굴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로마 카톨릭을 따르는 스위스 5개 주 연합군은 취리히로 쳐들어왔고, 취리히는 세 배나 많은 적을 맞서야 했다.

전쟁은 예상대로 금방 끝이 난다. 군목으로 참전하여 부상당한 병사들을 돕던 츠빙글리는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나무 밑에 쓰러져 있다가 잡혀서,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라는 굴욕적인 요구에 끝까지 불응하다가 무참히 살해당한다. 츠빙글리 동상에서 그가 칼을 쥐고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인 것은 바로 그 이유이다. 우리는 칼을 쥔 츠빙글리의 동상 앞에서 인증샷을 찍어야 하겠으나, 동시에 손에 쥔 칼 뒤에 있는 성경에도 눈길을 주어야 한다. 그가 죽는 순간까지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그의 심장 속에 품었을, 성경에 말이다.

2. 그로스뮌스터

그로스뮌스터는 취리히를 대표하는 대성당으로, 취리히 시내 웬만한 곳에서는 저 쌍둥이 탑이 보인다. 900년 동안 거의 그대로 보존된 대단한 건물이다. 그로스뮌스터 남쪽 출입구 청동문에는 츠빙글리의 일생이 묘사되어 있으니 놓치지 말고 살펴보자.

내부의 성당 장식물들은 종교개혁 당시 당국의 감독 하에 질서정연하게 치워지고 리모델링 되었다. 그래서 내부는 다른 유럽의 대성당들에 비하면 아주 단순하며 깔끔한 편이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이 성도들이 모일 텅 빈 공간만 남겼다.

츠빙글리가 죽은 뒤, 취리히 종교개혁은 하인리히 불링거의 손으로 이어졌다. 그로스뮌스터 예배당 벽에는 불링거 석상이 있다. 함께 다녔던 분들이 아까 봤던 츠빙글리를 떠올리며 "이 사람은 누꼬?", "츠빙글리 사촌 아이가?" 하셔서, "츠빙글리 사촌이 아니라 사위라고 알려드렸다.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은 뒤, 사제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었던 것이다.

3. 프라우뮌스터

프라우뮌스터는 본래 규모가 큰 수도원(수녀원)이었으나, 종교개혁 이후로 수도원은 폐쇄되고 예배당은 깨끗이 정비되었다. 현재까지도 개신교 교회로 쓴다. 내부는 개신교 예배당답게 조촐하나, 큼지막한 파이프오르간이 눈에 띈다.

프라우뮌스터는 예배시간이 아닐 경우에는 입장료를 받는다. 이러면 패키지 상품 형태의 종교개혁 탐방에서 내부 입장이 빠질 확률이 높다. 소박한 예배당일 뿐인데 왜 입장료를 받을까. 이곳에는 색채의 마술가로 불리는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있다. 아마 샤갈의 작품을 보겠다고 밀려드는 관광객 때문인 듯하다. 이 사진은 2003년도에 입장료를 안 받던 시절에 들어가서 찍은 것이다.

4. 베드로 교회

이곳은 유럽에서 가장 큰 시계탑을 가지고 있는 교회당이란 사실로 유명한데, 종교개혁사에서 보면 다른 사건이 더 유명하다. 취리히에서 가장 먼저 교회 내부의 우상을 다 뜯어낸 교회였던 것인데, 이 사건은 취리히 전체가 종교개혁에 돌입하는데 큰 자극과 힘이 되었다.

5. 펠릭스 만츠 순교지

재세례파에 속하여 일반적으로 급진적 종교개혁자로 분류되는 펠릭스 만치는 취리히의 강물에 수장당하는 방식으로 순교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철창에 가둬 강물에 빠뜨렸다가 꺼내기를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끔찍한 처형 방식이다. 다른 네 곳의 답사 장소에서 약간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충분히 도보로  다녀올만하다. 프라우뮌스터에서 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걷다 보면, 강둑 바닥에 기념비가 묻혀있다. 그는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강물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자유롭게 고백하는 교회를 소망하며 목숨까지 잃었다. 우리 시대의 가벼움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이런 이야기들을 알수록, 우리네 종교개혁지 탐방의 발걸음은 결코 가벼울 수 없다.

 


황희상
기독교 교리, 역사, 교육 등의 책을 집필하는 작가이다. 『특강 소요리문답』과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은 한국교회에 교리교육의 바람을 일으켰으며, 『특강 종교개혁사』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대한 충실한 소개로, 종교개혁의 후손들이 지향할 바가 무엇인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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