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시작_ 아름다운 맨발을 위하여
이야기의 시작_ 아름다운 맨발을 위하여
  • 심정아
  • 승인 2019.07.31 09: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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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아, 길 위에서_터어키 에베소, 흑백사진
심정아, 길 위에서_터어키 에베소, 흑백사진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돌려 지나온 길을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길이 그리는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하얀 개망초꽃들이 바람에 흔들흔들…, 길은 어딘지 포근하고 아련한 공기 속에 깊이 잠겨 있습니다. 길은 그처럼 부드럽고 아득합니다. 이윽고 가슴 한편이 아릿해지며, 여름날의 아지랑이처럼 하나둘 기억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언제부터였는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내가 아름다움을 찾아 길을 떠나온 날. 
아주 오래전, 어느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초겨울의 찬 바람이 외투를 여미게 하던 그런 날.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언젠가 넣어 둔 떨어진 단추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풍경들, 장면들, 사람들, 물건들, 색채들, 나무들, 얼굴들, 그런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걷고 생각하고 걷고, 또 생각하고 걷고는 하던, 그런 날 중의 어느 날이었을 것입니다. 

한 화가분이 10여 년 만에 올린 개인전 오프닝에 우연히 가게 되었습니다. 갤러리에 걸려있던 그림들 대부분은 자연의 풍광을 표현한 추상화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른 후 눈을 감고 그때 보았던 그림들을 떠올려 보는 것은, 정확하게 복원할 수 있는 기억은 아니라 해도 또 다른 차원의 감흥을 선물해 주는 것 같아요. 욕심을 내지 않은 소박한 선과 형태들, 황홀한 것은 아닌데 왠지 가슴 설레게 만들던 색채들, 색채와 색채가 만나 만들어 내던 우아한 경계선들,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작별 인사를 하려고 찾아온 어떤 섬세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닮은 그런 느낌, 그런 존재감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따스한 찻잔을 손에 쥐고 있을 때 몸 안에서 일어나는 아름다운 변화들, 따스한 감정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윽고 소박한 오픈 식이 시작되고, 관장님의 소개로 그날의 주인공인 화가분이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20년은 유행에 뒤져 보이던 피치 색의 허름한 양복을 입고, 수줍은 미소에 어눌한 말투, 인사말을 하고 머뭇머뭇 이 한 문장을 말씀하시는데 10분은 족히 걸린 듯싶습니다. 
"아름다움은, 숨겨져 있지만...., 찾으면 찾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가끔 그 겸손하고 서툴던 모습, 그러나 제 마음을 뜨겁게 건드렸던 그 말씀을 떠올려보고는  합니다. 때로는 사막 길 같았고 때로는 길조차 없는 것 같았던 길 위에서. 

심정아, 아름다움의 흔적_홍릉 수목원, 사진
심정아, 아름다움의 흔적_홍릉 수목원, 사진

정말 그랬습니다. 아름다움은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찾으면 찾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그분이 만든 창조물들 안에 늘 아름다움을 숨겨놓으셨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감동을 주었던 아름다움은 사람들 속에 숨겨놓으신 그분 자신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것은 거친 삶의 여정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사랑스럽고 온유해진 어떤 이의 얼굴에서 느껴지던 아름다움, 그의 곁에 머물면서 그의 얼굴이 되고 마음이 되어 주시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런저런 잡동사니들, 가짜들, 욕망, 다시 한번 가방 안에서 꺼내어 버리고,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저는 오늘도 길 위에 있습니다. 

저녁 무렵의 어스름이 조용히 그늘을 만들기 시작하는 작업실. 
길 위에 맨발로 서 있는 한 소녀를 그린 미완성의 작품 앞으로 조용히 의자를 놓고 앉아 봅니다. 조금만 더 하면 마무리가 될 터인데도, 그렇게 하기 싫은 작품이 있습니다. 마침표를 찍기 싫어지는 작품.  그냥 이렇게 무언가 아쉽고 미안한 마음으로  더 오래 바라보고 싶어지는 작품.
 

심정아, 슬픔과 위로의 소녀 (발 부분), 천 위에 인두 드로잉
심정아, 슬픔과 위로의 소녀 (발 부분), 천 위에 인두 드로잉

오늘은 당신의 맨발이 눈에 들어옵니다
조심스럽고 허름한 맨발입니다
당신의 맨발이  딛고 서 있는 그곳은 어떤 곳인지 
당신, 잘 지내고 있는지
아프지만 아름다운 일 
맨발로 걸어가는 일


맨발로 흙을 밟고 서 있었던 적이 언제인지 묻고 싶습니다. 발등을 간지럽히는 연한 풀잎들의 감촉을 느끼며 걸어본 적이 언제인지. 햇살에 데워진 흙의 온기와 까칠한 돌 조각들의 위협. 어제 내린 비로 질퍽해진 땅과 물웅덩이들을 맨발로 받아들이고 느끼면서 한 걸음 두 걸음 별다른 목적지 없이 걸어본 적이 언제인지. 가벼운 걸음이나 달리기를 위해 값비싼 브랜드의 운동화를 사서 신는 일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은 많지만, 맨발로 걷기 위해 신을 벗는 일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신발을 신지 않고 걷는다는 것이 자신을 비워낸 자의 낭만적 퍼포먼스로 안착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발을 신을 겨를도 없이 인생 밖으로 쫓겨난 사람, 한 번도 신발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신발이 지급되지 않는 사람. 그래서 오늘도 맨발로 서 있는 한 사람을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신발을 버리고 맨발이 되어 걷고 있는 한 사람을 떠올려봅니다. 

그리하여 모든 순례자의 발은 본디 맨발이었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맨발의 연대 속으로 들어와, 그 가슴 뭉클한 행렬에 끼여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순례의 목적지는 어떤 성스러운 교회도 신비한 기적이 일어났다는 장소도 아니라, 거친 땅 위에 맨발로 서 있는 한 사람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든 길 위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맨발을 위하여…, 아멘.  

심정아, 당신의 아름다운 발_기억의 방(윤동주시인추모설치), 부산비엔날레특별전, 2012년, 구 부산진 역 장표창고.
심정아, 당신의 아름다운 발_기억의 방(윤동주시인추모설치), 부산비엔날레특별전, 2012년, 구 부산진 역 장표창고.

심정아
드로잉, 오브제 설치, 사진, 영상, 퍼포먼스로 작업하는 예술가
울고 싶어도 제대로 울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다.
뉴욕의 Parsons 와 Pratt대학원을 졸업, 홍익대에서 “Broken Beauty”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작가홈피 www.jungahsh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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