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스트라스부르에 가는가
우리는 왜 스트라스부르에 가는가
  • 황희상
  • 승인 2019.07.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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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스트라스부르에 가는가.” 언젠가 답사팀과 함께 스트라스부르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했던 강의 제목이다. 종교개혁지 탐방이니까 종교개혁자들이 활동했던 도시를 가는 것은 맞는데, 그런 도시가 한둘이냐 이거다. 그 수많은 도시 중에서 왜 하필, 굳이, 스트라스부르를 가는지, 이유가 필요하다.

스트라스부르의 구 도심 ‘쁘띠프랑스’는 안동 하회마을처럼 강으로 오목하게 둘러싸인 마을이다. 유럽 여행자들이 예쁜 마을로 손을 꼽는 곳이며 신혼여행자들의  인기 코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쁨 그 자체’만으로는 우리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 쁘띠 프랑스는 과거에 프랑스 난민들과 집창촌이 몰려 살던, 그야말로 열악한 주택지구였다고 한다. 그러던 곳이, 종교개혁자들의 유입과 함께 도시 개혁과 정비가 함께 이루어지면서 예쁜 마을로 변모했다.

스트라스부르에 와야만 했던 칼뱅

칼뱅도 이 아름다운 도시를 사모했다. 스트라스부르는 부쩌를 중심으로 일찍부터 상당한 수준으로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던 도시였다. 그래서 칼뱅은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을 내고 나서 원래는 스트라스부르로 가려고 했다. 그곳이 ‘편안히 공부하기에’ 좋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의치 못했고, 일단은 제네바로 이동했다가 그곳에서 먼저 종교개혁을 추진하던 파렐을 만났다. 그 후 - 잘 알려진 일화와 같이 – 파렐의 추상같은 호통과 강권으로 제네바에서 목회를 시작한다. 하지만 초기의 강경한 개혁 작업은 제네바 의회의 반발에 부딪혔고, 파렐과 칼뱅은 함께 도시에서 쫓겨나고 만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제네바로부터 겪었던 일들을 이 글에 적지는 않겠다. (* 칼뱅 전기 참조) 결국 파렐은 뇌샤텔로 가고, 칼뱅은 애초에 가고 싶어 했던 스트라스부르로 발걸음을 돌렸다.

칼뱅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제네바에서의 쓰라린 경험을 뒤로하고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했을 때 아직 20대였던 젊은 칼뱅이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제네바에서 받은 부당한 처우를 주위에 호소하거나 다른 종교개혁자들에게 상소할 기회도 있었다. 혹은 제네바에서의 일을 자신의 ‘목회 실패’로 보고 좌절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칼뱅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런 경험을 하게 하신 이유가 있을 것으로 봤던 듯하다. 그는 곧장,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들과 힘을 모아 일하기 시작했다. 물론 지친 몸과 상한 심령으로 일단 며칠쯤은 퍼져서 쉬었지 싶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는 칼뱅과 같은 종교개혁 유망주 청년이 여독을 풀고 있을 정도로 한가한 도시가 아니었다.

당연히 스트라스부르는 칼뱅만 사모했던 도시가 아니었다. 당시 1천 명 가까운 프랑스 개신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종교개혁의 도시 스트라스부르로 이주했다. 스트라스부르 교회는 프랑스 난민을 위해 프랑스어로 예배하고 설교할 설교자가 필요했다. 프랑스 누아용 출신 칼뱅이 이것을 담당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칼뱅은 그 밖에도 프랑스 신자들이 모국어로 찬송할 수 있도록 시편 찬송가도 프랑스어로 번역(16곡) 했다. 칼뱅은 4~5백 명의 청중을 보살펴야 했는데, 주일에 두 번의 설교를 포함해서, 더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설교와 강의를 매일 했다. 이 시기에 기독교강요 2판을 썼고, 로마서 주석도 썼다.

칼뱅은 이곳에서 더욱 성숙한 목회자로 거듭난다. 버스에서 했던 강의의 콘셉트는 “우리는 성숙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였다.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에서 버미글리, 마틴부써, 요하네스 스트룸 같은 동역자를 만나서 한층 업그레이드된다. 그들에게 배우며 어쩌면 칼뱅은 제네바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돌아봤을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교회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고, 특히 교회의 조직과 정치와 교육 기법에 대해서도 많은 성숙을 경험한다. 그 결과물이 바로 제네바에서의 성공적인 둘째 사역인 셈이다.

▲ 칼뱅이 목회했던 부클리에르 교회당.
▲ 칼뱅이 목회했던 부클리에르 교회당.

부끌리에르 교회 근방에 도착하면 세계 여러 나라의 단어를 흰 설탕으로 그려 넣어 예쁘게 구운 생강과자를 진열해두고 파는 가게가  보인다. 그 바로 앞 골목에, 칼뱅이 살던 집과 교회가 있다. 우선 골목 어귀에 칼뱅이 거주했던 건물을 보자. 칼뱅은 여기서 지내면서 하숙생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일종의 하숙집 총무 역할이 아니었을까. 루터가 그러했듯 칼뱅의 집도 학생들, 목회자들과 대화하고 토론하고 공부하는 집이었을 것이다. 이어서 부끌리에르 교회를 둘러 보자. 골목으로 몇 걸음만 들어가면 간판이 있어서 찾기 쉽다. 칼뱅이 1538~1541년간 근무했다는 기록이 돌판에 새겨져 예배당 입구에 붙어 있다.

지성(知性)의 체육관, 김나지움

다음으로 가볼 곳은 교육 기관이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뱅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은 교육철학자이며 인문주의자, 앞서가는 위대한 사상가였던 요하네스 슈투름(Johannes Sturm, 1507~1589)이다. 그가 설립하고 운영했던 교육기관 ‘김나지움’은 칼뱅에게 엄청난 인사이트를 주었으며, 후에 제네바에서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하는 힌트가  된다.

슈투름이 왜 위대한 인물인가. 그는 가르치는 방법을 새롭게 시도했던 사람이다. 근대적인 수업 시스템과 교과 분류, 교과서 제작, 학교 운영의 조직화 등, 시대를 앞서갔던 그의 결과물들은 유럽의 중등교육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스트라스부르 시내 중에서도 가장 활기찬 느낌이 드는 학생의 거리(Rue Des étudiant)에 접어들면, 제대로 찾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김나지움 건물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노란 벽과 파란 지붕을 한 웅장한 건물이다. 지금도 여전히 학교로 사용하고 있다.
 

▲ 김나지움. 단어 자체는 ‘체육관’이란 뜻을 갖고 있으나, 중등 학생들의 종합 교육기관이라고 보면 된다.
▲ 김나지움. 단어 자체는 ‘체육관’이란 뜻을 갖고 있으나, 중등 학생들의 종합 교육기관이라고 보면 된다.

김나지움 대문 옆에 “Pôle Educatif Protestant de Strasbourg(스트라스부르의 개신교 신앙의 중심)”이라고 적힌 문패에 눈길이 머물고 마음이 머문다. 종교개혁은 교회와 함께 다양한 분야가 함께 개혁된 과정이자 결실이다. 즉, 종교개혁  목회자 뿐만 아니라 일반 성도들이 함께 달려들어 매진했던 운동이다. 신학뿐만 아니라 교육도, 상업도, 문화도, 삶의 아주 작은 영역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개혁된 삶을 살고자 했던 성도들의 땀과 눈물이 스며있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이었다.

그 밖의 장소들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에서 한 교회에서만 목회한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를 다니며 설교했다. 칼뱅이 사역했던 교회들은 생 니꼴라 교회, 생 마들렌 교회와 뇌프 교회 등이 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지금은 그때의 모습과 달라졌으니, 시간이 나면 들러보고 아니면 그냥 지나치자.

칼뱅의 결혼식이 있었던 성 마들렌 교회(St Madeleine Church) 건물 역시 마찬가지다. 190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새로 지었기 때문에 옛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다. 거리도 다소 떨어져 있으니, 다리가 아프다면 굳이 걸어가 볼 필요는 없겠다.

무조건 ‘많이’ 둘러보기보다는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천천히 여행하면서 동반자들과 많은 대화도 나누고, 여행지에 얽힌 역사와 사람과 사건들을 생각하며 생각을 확장해가는 것. 종교개혁지 탐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 아닐까.

▲ 마틴 부써가 목회한 성 토마스 교회 건물. 마틴 부써는 칼뱅에게 신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 마틴 부써가 목회한 성 토마스 교회 건물. 마틴 부써는 칼뱅에게 신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스트라스부르의 좁은 골목길을 거닐었을 그들

제네바에서 쫓겨난 칼뱅은 아마 실의에 잠겼을 것이다. 프랑스에서부터 동역하던 형제, 뒤 틸리마저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섰으니 말이다. 하지만, 온갖 모욕을 뒤집어쓰고 탈진한 상태로 돌아온 칼뱅이 스트라스부르에서 목도한 것은, 김나지움의 시작이었다. 제네바에서 쫓겨난 칼뱅에게, 그 아픔 너머에 존재하는 깊은 섭리 하심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대목이 아닐까. 젊고 혈기 넘쳤던 칼뱅을 낮추시고, 더욱 노련하게 만드셨다.(칼뱅은 그의 편지에서 제네바 시절 자신의 혈기를 반성한 바 있다.) 또한, 스트라스부르에서 슈투름을 만나게 하셨다. 경건과 지혜를 갖춘 젊은이들을 길러내는 김나지움을 경험케 하셔서, 이를 통해 평범한 도시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지 꿈꾸게 하셨다. 세속 권력자들에게도 이런 비전은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주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소망의 원동력은 결국 다음 세대의 맑은 눈빛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스트라스부르는 어디일까.
우리들의 성숙은 어느 도시에서 경험하게 될까...

칼뱅은 또한 이곳에서 이들레트 드 뷔레를 만나서 결혼했다. 그들은 스트라스부르의 골목길을 함께 걸었을 것이다. 그 거리를 걸으며  무슨 대화를 했을까. 결혼식을 했던 마들렌 교회당이 건너다보이는 강변에 서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제네바 돌아가는 상황, 본국 프랑스에서 핍박받는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가슴 아파했을까. 스트라스부르에서 일어나는 개혁의 결실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기뻐했을지도 모르겠다. 스트라스부르에 페스트가 창궐하여 카피토 등의 형제들을 떠나보냈을 땐 또 얼마나 절망스럽고 힘겨웠을까. 그동안 글로만 접했던 개혁자들의 삶이 바로 이곳 예배당과 길거리와 광장에서 펼쳐졌다. 지금 걷는 바로 이 돌길 위에서 말이다.


황희상
기독교 교리, 역사, 교육 등의 책을 집필하는 작가이다. 『특강 소요리문답』과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은 한국교회에 교리교육의 바람을 일으켰으며, 『특강 종교개혁사』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대한 충실한 소개로, 종교개혁의 후손들이 지향할 바가 무엇인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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