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로셸에서 만난 위그노의 후손과 프로테스탄트 박물관
라 로셸에서 만난 위그노의 후손과 프로테스탄트 박물관
  • 황희상
  • 승인 2019.07.18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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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로셸의 마지막 글이다. 오늘은 ‘라 로셸 프로테스탄트 박물관’ 관람. 이곳에 가려면 사진 촬영 허가 및 가이드 요청을 미리 메일로 신청하는 것이 좋다. 한글로 적어서 구글로 번역해서 보내면 그쪽도 구글로 번역해서 읽고 불어로 답을 보내올 것이다. 방문객이 많지 않기 때문에, 예약하고 가지 않으면 문이 닫혀있는 황당한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다. 웬만하면 예약하자! 박물관 가이드와의 시간 약속은 소속 교회(라 로셸 템플 교회 https://paroisse-larochellecentre.fr)로 하자. 이름이 템플 교회당이길래 무슨 가톨릭 성당인 줄 알았는데, 프랑스어와 영어 병기된 안내판을 보니 지금까지 프로테스탄트들이 다니고 있는 교회라고 한다.

필자를 안내했던 박물관 가이드는 백발의 하얀 커트 머리 할머니였다. 파란 버버리 코트를 입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채 나타난 그분은, 우리가 사우스코리아에서 왔다는 말에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왜 왔냐는 질문에, 우리는 한국의 장로교회 신자이며,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대한 책을 쓰고 있고, 라 로셸의 역사가 궁금해서 왔다고 말씀드렸다. 프로테스탄트의 후예라고 하니 곧바로 악수를 청하셨다. 짧은 악수를 하는 동안 큰 감동이 일었다. 같은 신앙을 공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순식간에 인종과 문화를 뛰어넘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할머니는 영어를 안 쓴 지 오래됐다며 연신 미안해하셨고, 우리는 오히려 잘됐다며, 우리도 영어를 잘 못 하니 쉽게 설명해달라고 부탁드렸다. 느린 움직임과 목소리에 떨림이 느껴지는 것으로 볼 때 연세가 꽤 들어 보이셨지만, 쾌활하고 친절한 기운이 느껴졌다. 할머니는 한 번 더 미안해하시며 박물관 열쇠를 두고 왔다며 친구가 가지고 올 거라고 잠깐 기다려야 한다고 하셨다. 나이가 드니 깜박깜박한다며 수줍게 웃으셨다.

조금 기다리니, 한적한 골목길에서 ‘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자전거 한 대가 나타난다. 자전거를 탄 분도 백발의 할머니셨다. 가방에서 떨리는 손으로 열쇠 하나를 꺼내 가이드 할머니에게 전해주시고 손 인사를 하며 떠나셨다. 순간 감이 왔다. 아. 이분들은 라 로셸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교인들이시구나.

박물관은 교회 건물 한 쪽에 통로가 있고 거기에 연결된 작은 방에 전시물이 꾸며진 형태였다. 우리는 일단 예배당으로 들어섰다. 친숙한 장의자와 강대상으로 단순하게 꾸며진 인테리어에 울컥 감동됐다. 이런 게 바로 프로테스탄트 교회다운 인테리어지... 로마 가톨릭 성당을 흉내 내며 화려하게만 지어져 가는 한국의 예배당 건축 분위기가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예배당을 훑어본 뒤, 할머니를 따라 예배당 옆문으로 들어가 소액의 박물관 입장료를 지불하고 드디어 박물관 관람을 시작했다.

전시물은 주로 16~17세기 종교개혁에 관한 대략의 개요, 프랑스 내부의 종교갈등, 그리고 거기에 얽힌 라 로셸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 아울러, 차분하게 이루어지는 해설은 최초의 위그노 도시였던 라 로셸에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는 프로테스탄트 교회 교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사진 설명 : 박물관 내부 소개를 위해 몇 장의  사진을 골라서 간단한 설명을 붙인다.

왼쪽 위 > 대표적인 종교개혁자들의 모습.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체코의 얀 후스, 멜랑히톤, 구스타프 아돌프, 츠빙글리, 히에로니무스, 칼뱅, 루터, 위클리프.

오른쪽 위 > 라 로셸에서 사역하던 목사 Pierre Richer가 라 로셸의 통치자 Guy Chabot de Jarnac에게 보낸 편지. Pierre Richer는 브라질에 위그노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콜리니 제독이 몰래 파견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연재글 ‘샹티 성’ 편 참조).

오른쪽 중간 > 앙리 드 기즈가 벌인 ‘바시의 학살 사건(1562)’ 기록.이 사건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위그노 전쟁이 일어난다. 바시 대학살에 대한 정보는 위그노 전문가 권현익 선교사의 글을 참조하자.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5531

아래 > 교황과 주교를 비꼬고 비판하는 기념 주화(?). 거꾸로 보면 인물들이 마귀처럼 보인다. 

왼쪽 위 > 1572년 라 로셸 신앙고백서.
왼쪽 아래 > 성 바르톨로매 축일에 의연하게 죽음을 당하는 콜리니 제독을 표현한 포스터 
왼쪽 중간 > 성 바르톨로매 축일의 학살 현장을 묘사한 포스터
중간 위 > 라 로셸의 개신교인들을 돕던 잔 달브레 등의 인물들
중간 아래 > 칼뱅의 뒤를 이어, 프랑스 종교개혁을 돕던 베자 
오른쪽 위 > 16세기 당시 프랑스의 신구교 분포 현황. 

이곳에는 프랑스 종교개혁의 개요를 알려주는 일반적인 전시물도 많지만, 라 로셸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전시물도 따로 모여 있다. 리슐리외 추기경이 바다에 방파제를 건설했던 당시의 흔적들과 유물들이 있고, 당시 도심과 주변 지역을 표시한 고지도 역시 보존되어 있다. 다양한 크기의 대포알도 보인다.

다양한 성경책이 진열된 곳도 보인다. 히브리어 원문에 주석을 달아둔 성경, 제네바 성경, 라 로셸 신자들을 위한 성경 등, 다양한 버전과 다양한 크기의 성경을 볼 수 있는데, 라 로셸 시민들의 성경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많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오래된 성경들이 꽂혀 있는 책장 앞에서 가이드 할머니는 라 로셸 공성전 패배 이후의 상황을 설명하셨다.

처절한 패배 이후...

라 로셸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았다. 명목상 - 그리고 법률상 - 낭트 칙령은 유효했지만, 법보다 주먹이 가까웠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의 자유를 드러내놓고 추구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형편. 이후 루이 14세 때에 이르러서는 낭트칙령마저 폐기되고 만다. 어쨌든 삶의 터전인 라 로셸을 떠날 수 없었던 시민들은 그들의 신앙을 잃지 않기 위해 생명을 걸고 조용히 분투한다. 작은 성경책을 만들어, 여인들은 머리 장식 속에, 남자들은 가슴팍 옷깃 사이에, 집안 어느 벽장 등에 숨겨놓고 몰래 읽었다.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탄압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라 로셸 시민들은 아이들 교육 역시 그들답게 해냈다. 아이가 7살이 되면 가톨릭 학교에 들어가서 강제로 가톨릭 교리를 배워야 했다. 라 로셸 시민들은 여기에 어떻게든 맞서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개신교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4살부터 글을 가르치고 성경을 가르쳤다. 잘못된 교리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말이다. 이제 겨우 입이 트이는 아이들에게 3년간 치열하게 그것도 비밀리에 신앙을 가르쳤을 사람들을 떠올리니,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정말이지 목숨처럼 지켜낸 그들의 신앙... 위그노의 역사를 보면 그 핍박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을 시대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폭풍우 같은 역사의 한복판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신교도들의 이야기 중에 우리가 아는 것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이제 관람을 마칠 시간이었다. 할머니와 우리는 룸에서 빠져나왔고 박물관의 문이 잠겼다. 할머니는 입장료를 받던 자리에 잠깐 멈춰 서서 가방을 뒤지며 뭔가를 찾고 계셨다. 무슨 방명록 같은 것을 적어야 하나보다 생각하며 기다렸다. 하지만 막상 할머니가 꺼내서 보여주신 것은 아주 작고 낡은 성경이었다.

할아버지가 전쟁에 나가서도 품에 지니셨던 성경이었다고 한다. 손녀딸에게도 개신교 신앙을 물려 주셨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성경을 소중히 간직하며 그 뜻을 이웃에게도 전하고 있는 손녀딸 할머니라니... 수백 년 전 위그노들의 수난과 무력해 보이는 저항과 헛된 죽음들을 절절히 간접경험하고서 가슴이 허하고 먹먹했는데, 그 열매와 결실이 바로 내 앞에 있었다. 한때 신교도들의 위엄을 드높였던 라 로셸에서 종교개혁의 가치를 전하는 백발의 위그노 할머니와 악수를 하다니 정말 뜻깊은 순간 아닌가. 그리고 우리 자신도 역시 신교도 신앙의 선배들에게서 뿌리를 둔,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열매 아닌가.

다시 예배당으로 나오면서 할머니께 양해를 구하고서 예배당을 꼼꼼히 살펴보고 사진을 찍었다. 할머니께 지금 교회 다니는 분은 몇이나 되는지 여쭤보니 잠깐 눈빛이 흔들리신다. 한때 400명 정도 다니던 교회에 지금은 40명뿐이라고 하셨다. 또, 무례한 질문일 수 있지만, 직설적으로 여쭤보았다. 왜 프로테스탄트이면서도 교회 이름에 지금도 Temple이란 단어를 붙였는지 말이다. 할머니는 템플과 예배당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이름 자체에 별 힘이 없음을 간결하고 명쾌하게 설명하셨다. ‘템플’이란 이름 자체가 오히려 신교도들의 저항과 자유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반증하고 있기에 버리지 않고 그대로 살려 둔 것 아닐까. 자신들의 역사를 잊지 않도록 기록으로 남겨 놓는 프랑스 신교도들의 자세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또 한 편으로, 프랑스의 종교는 시민혁명 이후로 지금까지도 억압과 심정적 통제를 겪고 있기에 개신교 신앙을 드러내기 위한 시도가 어려웠던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유럽에서 개신교의 위세가 몰락했다며 쉽게 혀를 찬다. 그러나 우리 눈으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고정된 지역에서 긴 시간 신앙을 이어가고 교세가 큰 것은 인간의 눈에나 가치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부름을 받은 자리에서 교회를 이루고 교회의 순결을 위해 노력할 뿐이지, 교회의 교세나 지속성 자체가 목표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자신에 대한 지식과 사랑과 순종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이루시고 통치하신다. 백성들을 일으키시고 불러 모으시고 찾으신다. 교회는 하나님을 좇는 백성들의 모임이지,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시금 우리 영혼에 분명한 울림을 가져다준다. 

이로써 프로테스탄트 박물관 관람을 마쳤다. 이날 이후 라 로셸이란 이름이 필자의 가슴에 강하게 새겨졌다. 영혼에 불씨 하나를 옮겨 받은 듯하다. 평생 잊지 못할, 감사한 여행이었다. 이곳을 여러분께 강력하게 추천해 드린다!

부록 : 다시 파리에서 발견한 라 로셸의 흔적

아름다운 라 로셸에 언제 또 와보나 싶어 아쉬운 마음에 항구 근처를 바라보는데 전통 복장을 한 사람들이 떼 지어 걷는 모습을 발견했다.

아마도 거리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황토색 외투에, 들고 있는 깃발에는 노랑 백합 문양이 새겨져 있다. 라 로셸 고유의 문장인 것 같아 사진에 담아 두었다. 그런데 이 짧은 순간은 일종의 ‘복선’과도 같았다. 우리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다시 이 문양을 발견하게 된다.

다음  날 파리 시내 답사 도중, 다리가 슬슬 아파져 와서 길가에 자동차들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세워둔 작은 기둥에 앉아 쉬던 중이었다. 마침, 우리가 쉬는 곳 앞에 성당이 하나 있었고, 유적지 안내판이 있길래 확인해보기로 했다. 순간 갸우뚱했다. 방금 본 문구 중에 ‘La Rochelle’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상해서 다시 확인했더니 정말이었다! 놀라서 꼼꼼하게 번역해보니 ‘라 로셸 함락 후에 그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개축한 성당’이라는 것 아닌가!
 

기대와 흥분에 벅찬 마음으로 성당을 둘러보았다. 성당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성당 앞쪽 제단화에 눈길이 갔다. 거기엔 다름 아닌 리슐리외와 루이13세가 그려져 있었다. 세상에! 마리아가 승리를 축하하는 듯 두 사람에게 풀 한 포기를 하사하고 있었다. 배경에는 라 로셸을 상징하는 생니꼴라 타워와 체인 타워가 보이고 전사자 한 명이 누워있었다. 라 로셸의 위그노 병사였다. 흐릿하지만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망토에 그려진 문장이 어제 본 라 로셸 전통의상의 그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간단히 해설해보자. 왼쪽 그림은 동일한 사건을 다룬 다른 버전이다. 두 그림 사이에 차이점이 보이는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차이는 빨간 망토를 걸친 사람의 "위치"가 다른 것이다. 저 사람은 라 로셸 포위전을 기획했고, 준비했고, 직접 현장 지휘까지 했던 "리슐리외 추기경"이다. 교회의 직분자가 세속 정치에 직접 관여하는 것만으로도 두 번 생각할 일인데, 그는 아예 직접 전장을 누비면서, 위그노들의 도시였던 라 로셸을 철저히 압박 섬멸한 역사를 가진 자이다. 정복된 라 로셸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위그노들은 강제 개종은 물론, 조그마한 성경책 소지조차 허락되지 못했다.

리슐리외는 라 로셸을 철저히 짓밟은 뒤, 정치와 종교의 야누스가 되어 자신의 업적을 이렇게 치장했다. 빅토리 성당을 세우고, 그곳 최고의 핫스팟에 기념벽화를 놓으면서 그가 채택했던 그림은 "우측" 그림이었다. 그가 바라던 어떤 조건을 "좌측" 그림은 꼼꼼하게 만족시키지 못했고, 탈락했다. 그는 어떤 포지션을 원했을까. 그것은 바로, 성모 마리아와 루이 13세 "사이"에 위치한, "중보자"였다.

그렇다. 교회의 직분자가 세속 정치에 맛을 들이면 더럽고 추한 예술품이 영원토록 남아서, 그의 중심의 악함을 널리 칭송(?)할 것이다. 라 로셸을 생각할 때 우리는, 위그노들의 처절한 고난과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에서도 배울 점이 많겠지만, 그 도시를 점령했던 자들에 대해서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욕망이 무엇이었는지. 오늘날 우리 주위에 그런 욕망을 가진 자들이 여전히 있지 않은지, 나 자신은 그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지 말이다. 우리들의 종교개혁 탐방길에 그러한 진지한 고민과 반성 또한 함께하기를 소망한다.


황희상
기독교 교리, 역사, 교육 등의 책을 집필하는 작가이다. 『특강 소요리문답』과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은 한국교회에 교리교육의 바람을 일으켰으며, 『특강 종교개혁사』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대한 충실한 소개로, 종교개혁의 후손들이 지향할 바가 무엇인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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