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의 생가가 있는 누아용
칼뱅의 생가가 있는 누아용
  • 황희상
  • 승인 2019.06.20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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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 현대의 누아용은 작은 마을이다. 필자가 이곳에 취재차 갔을 때는 당시 파리에 거주하며 연구 중이던 위그노 전문가 ‘권현익 선교사’의 도움을 크게 받았음을 미리 밝힌다. 누아용 취재도 이분 덕분에 가능했으며, 많은 내용을 배웠다.

종교개혁 탐방팀이 이곳을 찾아야 할 이유는 누아용 종교개혁 박물관 때문이다. 3층 건물로 된 이 박물관은 ‘칼뱅의 생가’로 알려져 있다. 정확하게는, ‘생가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칼뱅이 누아용에서 태어난 사실은 알려져 있지만, 생가까지 밝혀져 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2차 세계대전 때 이곳을 점령한 독일 덕분에 칼뱅 생가의 위치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폭격으로 완파되어 계단 일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독일 신학자들이 칼뱅의 몇 가지 기록물을 가지고 이곳을 찾아와서 건물 입구의 위치와 방향, 계단의 형태 등을 추정해서 지금의 주소지를 칼뱅 생가로 특정했다고 한다. 신기한 일이다. 하긴, 칼뱅의 생가를 찾으려는 의지는 아무래도 구교 국가였던 프랑스보다는 신교 국가 독일에서 더 컸으리라. 프랑스는 더구나 시민혁명까지 겪으면서 교회에 대한 저항심이 노골화됐으니, 칼뱅에 대한 관심은 미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곳에 가기 전에 탐방팀 리더는 미리 사진촬영 허락을 구하는 메일 정도는 보내두는 것이 좋겠다. 이곳 박물관을 담당하는 직원들도 칼뱅을 잘 모른다. 좋아하지 않는, 관심도 없는 사람의 생애가 담겨 있는 박물관을 운영한다는 것이 필자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데, 그래도 유럽은 개인의 역량보다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시스템과 규율에 의해 움직이는 분위기라서 그런지, 박물관은 아주 깔끔하게 보존되고 있다.

박물관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입장료는 1인당 3유로 조금 넘는다. 입구에는 입장권과 기념품, 관련 도서를 팔고, 2차 대전 때 파손되었던 생가를 복원하여 건물을 완성하기까지의 자료들이 그림과 글로 설명되어 있다. 몇 계단을 올라가는 1층에는 작은 전시실이 있고, 칼뱅 관련자들에 대한 소개와 그들이 쓴 책이나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다. 2층부터 3층까지는 본격적인 종교개혁 전시실이다. 특히 3층에는 당시 위그노들이 핍박을 피해 말씀을 들을 때 이동하기 편하게 제작된 이동식 설교단, 칼뱅의 저서 기독교 강요 사본 등, 실물 사료들이 많이 비치되어 있다. 오르내리는 나무 계단이 가파른 편이니 주의해서 움직이자.

1층

종교개혁 초기 칼뱅과 관련된 인물들의 초상화와 당시 사용되었던 실제 면죄부(면벌부), 성경과 주석, 교리문답 등의 인쇄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한쪽 벽면에 석조 조각상이 보인다. 성경을 필사하는 학자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이 사람이 칼뱅일까? 생김새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칼뱅이 아니라 칼뱅 사촌이다. 올리베땅(Olivetan : Peter Robert, 1506-1538). 성경을 자국어인 프랑스어로 최초로 번역한 인물이다.

올리베땅은 스트라스부르에서 공부했고, 부써에게서 히브리어를 배웠다. 프랑스의 종교개혁자들은 자국어로 된 성경 번역 작업을 올리베땅에게 맡겼고, 2년의 시간 동안 번역이 이루어졌다. 이때가 1535년이고, 당시 스물 다섯 살의 칼뱅이 프랑스어 성경의 소개문을 작성했다. 1536년에 기독교강요가 출간되었으니, 칼뱅과 올리베땅, 그리고 다른 종교개혁자들 사이가 얼마나 밀접했겠는지 알만하다. 성경을 자국어로 보는 것이 금지된 시기에, 목숨을 걸고 모든 신자들을 위해 묵묵히 번역작업을 하고 있었을 올리베땅을, 이곳에서 만나보자. 종교개혁의 역사에는 이런 분들이 계셨다. 그리고, 외울 수 없을지언정 그 이름을 한 번이라도 소리 내어 발음해보자.

중요한 인물을 한 명 더 알아보자. 칼뱅에게 영향을 주었던 다른 한 사람, 자크 르페브르 데따쁠(Jacque Lefevre d’ETAPLES, 1455-1536). 그는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탁월한 당대의 지식인이었지만, 박사나 교수 타이틀을 걸지 않고 일반 성도로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수많은 개혁자들이 이 사람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교회사나 종교개혁사에서 크게 다뤄지지 않는 인물, 후대에는 잊힌 이름이지만, 그 시대 속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한 사람들에게 마음이 간다. 종교개혁지 탐방을 하는 우리들 역시, 이름 한 글자도 남지 않아도 좋으니 한국 교회가 조금이나마 회복되는 데 기여하는 삶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여행을 대하면 좋겠다.

한쪽 벽면에는 실제 사용되었던 면벌부(면죄부) 사본이 걸려있다. 이깟 종이 한 장에 유럽 곳곳의 성도들이 신음했단 말인가 싶을 것이다.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그 분만으로부터 나오는 양식을 먹어야 할 성도들의 영혼이, 이 종잇조각에 유린당하고 굶주렸다. 그랬던 그 종이가 이제는 역할이 바뀌었다. 이곳에 똑똑히 전시되어, 당시 교회의 부패가 어떠했음을 생생하게 증거하는 물건이 된 것이다. 한국교회의 부패는 훗날 어떤 물건이 증거하게 될까.

한쪽 벽면에는 실제 사용되었던 면벌부(면죄부) 사본이 걸려있다. 이깟 종이 한 장에 유럽 곳곳의 성도들이 신음했단 말인가 싶을 것이다.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그 분만으로부터 나오는 양식을 먹어야 할 성도들의 영혼이, 이 종잇조각에 유린당하고 굶주렸다. 그랬던 그 종이가 이제는 역할이 바뀌었다. 이곳에 똑똑히 전시되어, 당시 교회의 부패가 어떠했음을 생생하게 증거하는 물건이 된 것이다. 한국교회의 부패는 훗날 어떤 물건이 증거하게 될까.

고개를 돌리면, 어떤 여성의 초상화가 눈에 들어온다. 마르게리따 당굴렘(Marguerite d'Angoulême). 나바르 공국의 여왕이자 앙리 4세의 할머니, 앙리 4세의 모친인 잔 달브레의 어머니이다. 앞의 글에서 앙리 4세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다. 그녀는 또한 프랑스 문예부흥을 이끌어낸 왕 프랑수아 1세의 누나이기도 하다. 그녀는 시인이었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르네상스를 적극 수용하였고, 초기 종교개혁사상 역시 수용하여 종교개혁자를 보호하기도 했다. 또, 그녀의 딸 잔 달브레는 모친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신교를 받아들이고 프랑스 왕국의 핍박으로부터 개혁자들을 보호하는 일을 자처했던 인물이다. 카트린 드 메디치의 딸 마르그리트 발루아와 앙리 4세의 결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결혼 예식을 로마 가톨릭 방식으로 할 것이냐 하는 문제로 프랑스에 갔다가 돌연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설에 따르면 카트린 드 메디치의 간계로 독살을 당했을 것이라고도 한다. 카트린 드 메디치가 앙리 4세의 결혼식 당일에 바르톨로뮤 학살을 허가했던 역사를 생각하면 독살설이 아주 가능성 없진 않아 보인다. 잔 달브레는 가톨릭으로 다시 개종해버린 남편과 대치해서 전쟁을 벌일 정도였다고 한다. 남편과 전쟁이라니,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그러나 삶을 지탱하는 모든 것, 모든 인간관계와 목숨까지 걸고 신앙을 위해 싸워야 했던 그 시대를 지금의 시각으로 간단히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니, 그건 정말 가당치 않은 일이다.

벽면 중에 바깥으로 난 창문은 유리창 대신 창호지 같은 종이로 창문이 덮여 있다. 거기에 적힌 글씨는 바로 칼뱅의 서명이다.

2층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가보자. 2층에는 그림과 기록물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다. 수많은 그림을 다 해설할 수는 없겠지만, 몇 장만 보도록 하자.

#1. 위 왼쪽 : 칼뱅의 임종 당시를 그린 상상화 - 중세에는 뛰어난 인물들이 죽으면 그 무덤과 유골뿐 아니라 그가 지닌 물건들까지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사람들의 비뚤어진 종교심을 잘 알았던 칼뱅은 자신의 무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당부했다. 오늘날 제네바에 있는 그의 무덤은 초라하기 그지없고, 방문객도 거의 없다. 그만큼 칼뱅은 하나님도 잘 알았지만 인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을 잘 안다 말하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을 보면, 늘 허점과 다툼과 잡음이 끊이질 않는다.

#2. 위 오른쪽 : 칼뱅의 아내 이들레트의 초상화 - 칼뱅은 후사를 두지 못했다. 그의 아내 이들레트는 칼뱅 못지않게 병약해서 아이를 낳아도 사산하거나 어려서 죽었다. 자녀 하나는 잃어버려 행방불명 상태로 찾지 못했으며, 칼뱅은 그 아이의 소식을 평생 기다렸다고 한다.

#3. 아래 > 오른쪽 : 갸스파르 드 꼴리니 제독의 3형제. 왼쪽부터 오데뜨, 갸스파르, 프랑수와

우리는 이곳에서 프랑스 종교개혁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 하나를 만나봐야 한다. 바로 콜리니 제독이다. 그는 프랑스 종교개혁사에서 정말 정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프랑스의 대귀족이자 해군 제독이었던 그는 위그노 보호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세 형제 모두 어찌나 용맹하던지, 종교전쟁과 외세 침략으로 인해 벌어진 온갖 전장에 나가 싸우고 잡혀서 갇히고 다시 풀려나곤 했다. 특히 콜리니 제독은 프랑스가 브라질 식민지를 건설할 때 이곳을 위그노들의 피난처이자 안식처로 만들기 위해 비밀리에 원정대를 보내기도 했다. 프랑스 땅에서 위그노들의 삶이 얼마나 위태했길래 식민지까지 만들어 주려고 했던 것일까. 신앙의 자유를 찾아 본토 고향을 떠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위그노들... 불안하고 잔혹한 시국에서, 왕에게 충성을 다하면서도, 누가 시키지도 않은 소명을 다하기 위해 믿음의 형제들을 지켜내기 위해 꼴리니 제독의 심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결국 그는 얼마 안 가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 때 살해당하고 만다. 천국의 상이 크리라 믿는다. 꼴리니 제독에 대한 이야기를 추적하다 보면 마음이 울적해진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신앙이 가리키는 바를 위해 내던지면서도 부실한 왕가를 위해 우직하게 충성하는 모습이 가슴을 치게 만든다.

#4. 아래 왼쪽 : 종교회의 - 2층에는 종교개혁자들의 처분에 관한 각종 종교회의와 그 참석자들에 관한 그림들도 전시되어 있다. 카트린 드 메디치의 남편 앙리 2세는 르네상스는 받아들이지만 신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귀족과 종교인들을 모아 회의를 하던 중, 한 법관이 일어서서 종교의 자유를 달라고 제안한다. 격분한 앙리 2세는 이 사람을 처형한다. 그러나 잔혹한 처형의 모습을 지켜본 프랑스 시민들 사이에 오히려 신교도 신앙이 퍼져나간다.

이 와중에 제네바에서 칼뱅에게 가르침을 받은 2백여 명의 신교도들은 다시 자신의 나라인 프랑스로 돌아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종교개혁 사상을 전파한다. 종교재판을 통해 신교도를 죽이고 또 죽이던 카트린 드 메디치는 이제 더 이상 물리적인 제거로는 신교도 제거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종교적 화해를 이루어 보고자 시도한다. 로마 가톨릭과 신교도들을 총회에 불러 모아 교리적 차이를 들어보고 화합을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이 회의에 제네바는 칼뱅의 제자 베자를 보내어 그들의 신앙, 곧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를 선포하고 로마교 사제들의 반론에 대응한다. 그런데 이 회의를 묘사한 그림에도 콜리니 제독이 등장한다. 이 회의 역시 콜리니 제독의 중재로 열렸던 것이었다.

생각할수록 종교개혁은 소수 영웅들의 일이 아니다. 촘촘하게 엮여있는 인물 관계도와 함께 역사를 따라 발견되는 수많은 개혁자들의 작업과 그들의 목숨이 자양분이 되어야 가능했던, 교회 모두의 역사였다.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닮고자 하는가.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종교개혁의 현장에서 만나는 개혁자들의 흔적 앞에 서면 늘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 우리의 다음 여행지는 바로 이 꼴리니 제독과 관련된 샹티성이 될 것이다.)

3층

이곳 3층에는 종교개혁 당시 긴박하고 어수선했던 프랑스 내의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들을 드러내는 물건들을 잘 진열해두고 있었다. 

#1. 위, 왼쪽 >> 종교개혁자들이 모여 있는 상상화. 한가운데 촛불은 진리의 말씀을 상징한다. 이 촛불을 사제 하나가 입김을 불어 꺼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다.

#2. 왼쪽 의자와 오른쪽 위 광야에 모여 있는 군중들의 그림은 위그노들의 신앙생활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위그노들은 심한 핍박 가운데 몰래 예배를 드려야 했다. 왼쪽 사진의 의자는 말씀을 전하기 위한 강대상인데, 접고 펼칠 수 있게 제작됐다. 유사시에 급하게 정돈해서 들고 도망칠 수 있도록 말이다. 사막에 서있는 군중들은 지금 설교를 듣고 있다. 모두 우산을 하나씩 들고 있고, 절벽 위에도 두세 사람이 우산을 들고 있다. 절벽 위 사람들은 일종의 파숫꾼이다. 프랑스 정부군이 시야에 들어오면 우산을 접어 신호를 주고, 사람들은 즉시 흩어졌다. 그들은 이렇게까지 해서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말씀을 듣기 위해 목숨을 걸고 모여야 했고, 또한 흩어져야 했다.

#3. 아래 줄 가운데 건물 모형도는 1564년부터 1567년 사이에 사용된 위그노 예배당의 모습이다. 건물은 강대상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모이도록 되어 있다. 말씀이 중심이고 모두가 평등하다. 온갖 우상숭배로 뒤범벅된 로마 가톨릭의 미사와 신전화된 성당의 개념에서 철저하게 개혁하고자 했던 그들의 염원이 투영된 건축양식이다.

#4. 아래 오른쪽 배는 갤리선이다. 수많은 위그노가 고문당하고 죽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노예선에 팔리기도 했다. 거기서 말 그대로 혹사당하다가 지치면 죽어갔던 것이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 존 녹스도 프랑스 갤리선에 끌려가서 힘든 생활을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던 사람이다.

누아용 성당

박물관에서 나와서 잠깐 쉬자. 누아용 구도심은 작은 마을이라 모두 천천히 걸어서 이동할 수 있다. 시청, 누아용 가톨릭 학교 등을 가볍게 구경하면서 걸어보자. 그리고 누아용 성당으로 이동하자. 먼저 성당 주변을 빠른 걸음으로 스캔하듯 산책하자. 누아용 성당은 칼뱅이 뛰놀던 곳이자, 세례를 받고 또 성직록을 받기 위해 방문했던 곳이다. 칼뱅은 교회 회의에 무슨 이유로 불참한 까닭에 교회 감옥에 갇히는 벌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칼뱅의 아버지는 참사회 회원으로서 교회 재산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가 비리를 목격하고 내부고발자가 되었다가 고초를 겪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칼뱅의 아버지는 성직자들에게 지긋지긋해졌는지, 칼뱅에게 성직자가 아닌 변호사가 되길 당부했고, 칼뱅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

성당 외벽을 따라 걷다 보면 목조로 된 성당 부속건물이 보인다. 도서관 건물이다. 종교개혁 이전의 로마 가톨릭은 얼마나 타락했던지 성직매매가 극심했고, 심지어 7살 어린아이가 사제가 되거나,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사제도 있었다고 한다. 사제들이 무식해도 괜찮은 이유는 굳이 모든 사제가 말씀을 해석하고 설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사 의식을 통해 종교적인 퍼포먼스만 취하면 예배가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니, 교육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물론, 중세 교회에도 훌륭한 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성도들에게 흘러가지 않고 갇혀 있어서 문제였다. 중세 교회는 도서관도 있고 학교도 운영하는 등 하드웨어를 갖추었음에도 그 모든 시스템이 성경 말씀을 밝히 드러내기보다는 희석시키고 감춰버리는 도구가 되었다.

성당 내부를 보자. 성당의 맨 앞쪽, 제단이라 불리는 곳엔 어느 성인의 정강이뼈(?)가 놓여있다는데, 보자마자 한숨이 나온다. 어떤 성당에서는 성인의 유골이 있다고 해서 오랫동안 명성을 떨쳤는데, 최근에 과학적으로 유골을 분석해보니 사슴 뼈라는 게 밝혀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성당은 그 뼈다귀를 버젓이 두고 있고, 신자들도 개의치 않고 거기에 예를 표한다는 것이다.

 

누아용 답사를 마치며

누아용 답사를 도와주신 권현익 선교사님은 필자를 생 레베끄라는 작은 마을로 안내하셨다. 이 마을은 칼뱅의 조부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교사님이 참고한 책에는 칼뱅의 조부가 칼뱅과 그 형제들에게 ‘강물은 바다로 흐른다’라고 하면서, 넓은 세계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포부 있게 살라고 가르쳤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 영향인지 칼뱅의 형제들은 누아용을 벗어나 파리로 옮겨 일하며 살았다고 한다. 권선교사님은 칼뱅에게 이런 조부가 있었기에 칼뱅이 중세 교회의 구습에 포로로 잡혀있지 않고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당시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적 리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정하신다. 필자도 그분의 견해에 동의한다.


황희상
기독교 교리, 역사, 교육 등의 책을 집필하는 작가이다. 『특강 소요리문답』과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은 한국교회에 교리교육의 바람을 일으켰으며, 『특강 종교개혁사』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대한 충실한 소개로, 종교개혁의 후손들이 지향할 바가 무엇인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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