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 강도헌
  • 승인 2019.06.07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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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니키노_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바실리우스와 혈연관계는 아니었지만 나이는 같았고 그의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바실리우스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처럼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도 카파도키아의 부유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나지안주스의 감독이었으며, 그의 어머니 논나는 그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지안주스 그레고리우스는 바실리우스와 함께 아테네에서 공부를 마친 후 364년에 성직 안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실리우스의 끊임없는 요청과 귀찮을 만큼 강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리우스는 수도원 입회를 거부하였습니다. 분명 수도원의 매력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 수도원주의는 거절하였습니다.

결국 바실리우스는 그레고리우스에게 자신의 관할 아래에 있는 카파도키아 사시마의 작은 교구 감독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들의 우정 관계는 거의 깨질 뻔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레고리우스는 감독이 요구하는 행정적인 교회 업무를 싫어했고 연구와 저술활동 등 한 지역 교구 사제로 활동하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을 살펴보면 그가 비록 수도원 서약을 한 바는 없었지만 마음으로는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자기 몸을 위한 식사나 운동, 휴식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에 건강을 거의 잃어버렸는데, 그럼에도 그레고리우스는 『신학적 웅변』(Thelolgical Orations)과 같은 저술을 통해 각종 이단들에 대항하여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변호했던 신학자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381년 제2차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콘스탄티노플에서 소집을 했을 때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를 그 도시의 총대감독(실제로는 로마의 감독과 동등한 위치이다.)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황제는 그레고리우스에게 공의회를 주재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겸손했던 그레고리우스에게 이러한 역할이 주어지자 그는 세상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지만, 사실 그는 이 같은 역할을 원하지도 않았고 감당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임무를 다해 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곧 사임을 해 버리고 고향 나지안주스로 돌아가 조용한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그가 예기치 않게 일찍 은퇴를 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과 에큐메니컬 공의회 의장직을 둘러싼 심한 정치적인 논쟁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것으로 인해 그는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즉, 아리우스파 감독들과 정통 신앙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그가 불법을 저지르고 부적절한 행동을 하였다고 거짓으로 그를 고소했던 것입니다.

그의 『신학적 웅변』과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대한 그의 공헌으로 인해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그 신학자(The Theologian)”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의 설교들을 논평하면서 “그레고리우스는 한 세기 동안의 논쟁을 몇 쪽으로 그리고 몇 시간 안에 요약하고 끝맺었다.”고도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카파도키아 신학자들 중에 가장 위대하다거나 또는 가장 훌륭한 자로 간주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실리우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의 위대한 명성은 다음 시간에 살펴볼 세 명 중에 가장 젊고 교육도 적게 받은 바실리우스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강도헌
제자삼는교회 담임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프쉬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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