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의 재발견
성찬의 재발견
  • 가진수
  • 승인 2019.05.0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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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크리스천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성찬의 시간에 부담을 느낀다고 말한다. 크리스천이라면 성찬식을 진행하는 주일에는 ‘혹시 예배가 늦게 끝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예배가 줄지어 있는 대형교회일수록 정해진 시간에 예배를 마치려면 성찬이 있는 주일은 설교 말씀을 조금 줄인다든지 아니면 다른 시간을 줄여야만 하는 부담이 앞설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예배는 성찬이 점점 의미 없는 시간으로 약화하여가고 있음을 느낀다.

신약에는 예배의 정형화된 모습을 찾기 어렵고 파편적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초대교회 예배의 모습을 다음 말씀에서 일견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2-47)

초대교회 예배의 두 가지 구조는 ‘말씀’과 ‘성찬’이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을 나누고 떡을 떼며 그들의 신앙을 유지해나갔다. 중요한 것은 46절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로 성찬을 진행하면서 기쁨이 넘쳤다는 사실이다. 

분명 초대교회 예배에서의 성찬은 기쁨이 넘치는 실제적인 예식이었다.

누가복음 24:14-32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제자)’ 말씀이다. 물론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던 찬양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의 배경이다. 열두 제자는 아니지만, 또 다른 제자라고 알려져 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이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14-32)

30절과 31절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말씀과 뒤에 나오는 35절 말씀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는 성찬 예식이 피상적인 형식적 예식이 아닌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놀라운 능력을 경험한다는 사실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떡을 떼는 성찬 예식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심과 보혈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통로였다.

로버트 웨버 박사는 이 말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떡을 떼는 것은 단지 예수의 죽음을 시무룩하고 건조하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대한 훌륭한 기념이자 축제이다.”

초대교회 예배 모임에서의 ‘성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엄청난 상징성을 지닌 필수 예식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다시 오실 소망의 예수를 이 성찬 예식을 통해 다시 한번 강력하게 경험하고 기쁨을 누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예식이 약화하였는가? 그것은 교회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로마 가톨릭은 이 성찬의 중요성을 그들의 예식(미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16세기, 1517년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쯤에는 성찬 예식의 의미가 약화할 때로 약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혁의 단초가 될 정도로 악의적이었다. 그래서 성찬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당시 많은 종교개혁자의 청산 목표가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의 강력한 청산 의식에 성찬의 예식과 의미는 점점 약화하여 갔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교단마다 차이는 있지만 매주 성찬을 행하는 교단은 소수에 불과하다. 한국 교회에서의 성찬도 마찬가지로 1년에 몇 차례 중요한 절기에 행하는 교회가 상당수를 차지한다.

2년여 전 나는 LA 할리우드 근처에 위치한 ‘리얼리티 LA(Reality LA(https://realityla.com)’ 교회 예배에 참석할 기회를 얻었다. 1시간 30분 정도 드리는 예배에는 청년들이 80%는 되어 보였다. 지역의 한 고등학교 강단을 빌려 예배를 드리는데, 1000여 명 정도가 함께 드릴 수 있는 공간의 강당이 꽉 찰 정도로 열기가 있었다.

예배는 성장하는 보통의 현대적 교회의 예배와 같이 예배팀과 인도자가 30여 분 찬양을 이끌어가고 있었고, 50여 분의 말씀 또한 매우 복음적이었다. 이후 성찬식이 진행되었는데 여기서부터 나는 보통의 여느 교회와는 다른 모습의 성찬식을 보았다. 성찬식은 30 여분 진행되었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기억에 남을만한 성찬식을 본 적이 없었다.
좌석 옆 통로와 강당 앞에 빵이 놓여 있었는데, 예배에 참석한 젊은이들을 비롯한 성도들은 그 자리에서 기도로 준비하며 순서를 기다리기도 하고, 앞서 빵을 뗀 젊은이들은 강당 앞에 나가 단 밑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또는 빵을 떼고 자리에 돌아와 손을 들거나 고개를 숙이면서 각자의 표현으로 기도했다. 찬양은 성찬식이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우리가 잘 아는 보혈의 찬양이 계속 불리었으며 연주되었다.
30분 정도의 다소 긴 시간은 매우 짧게 느껴졌으며 그 모습이 형식적이거나 전혀 인위적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젊은이들이 간절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예전에 본 적이 없었다. 지역적으로도 할리우드는 세속적인 문화의 본거지나 마찬가지인데, 성찬에 참여한 젊은이들의 결단과 감사의 표현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또 한 번 인상 깊은 성찬 예식은 플로리다 잭슨빌에 위치한 웨버 대학원(Institute for Worship Studies)에서다. 로버트 웨버(Robert E. Webber) 박사가 세운 학교로 오래전 이곳에서 공부할 때 캠퍼스 안에 있는 성공회 교회(Episcopal Church) 예배에 참석했었다.
예배의 시작과 더불어 조금은 보수적인 찬양이 20분 정도 불렸으며 설교 말씀이 30분 정도 선포되었다. 이후 성찬 예식이 30여 분 가까이 진행되었는데 예배자들은 앞으로 나와 각각 예식에 참여했다. 중요한 점은 성찬식이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로 진행되었으며, 찬양은 경건의 찬양과 보혈의 찬양, 기쁨의 찬양이 적절하게 연주되었다. 솔로로 찬양을 부르기도 했으며, 트럼펫 주자가 은혜로운 찬양을 연주하기도 했다. 성찬식에 참여하러 나가면서 서로 간단하게 인사하기도 했으며, 전체적인 분위기가 밝고 기쁨이 가득한 분위기였다.

예배에 참여하면서 만일 한국교회에서 이렇게 성찬식을 진행한다면 불경스럽다고 할 뿐만 아니라, 서로 인사하며 간단한 대화를 하는 사람들에게 아마도 많은 눈총을 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런 성찬식의 분위기가 성경적인 성찬의 모습에 가깝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십자가의 보혈에 대한 경건성과 부활에 대한 기쁨과 감사, 그리스도 안의 교제가 살아있는 성찬 예식을 경험했다.

한국교회 예배에서의 성찬식이 지루해지고 외면을 받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성찬식의 본질이 약화하였기 때문이다. 성경적인 성찬의 회복만이 지금의 성찬의 의미를 되살릴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 부활과 재림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웨버 박사는 예배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예배란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사랑, 그분의 사역을 기억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고난, 부활과 재림이 지금 재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들이 지금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피상적이 아니라 생생하게 느껴지고 재현되어야 한다. 우리의 찬양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해야 하며, 말씀은 좀 더 복음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들, 즉 성경의 말씀들이 재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감사가 넘쳐나고 결단되어야 하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 가운데 경험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찬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성경적인 의미의 성찬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기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기념하는 것이다. 떡을 떼며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보혈의 의미를 기억하며 되새기는 것이다.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은 매우 상징적인 이 예식에 몸과 마음이 참여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십자가의 보혈을 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둘째는 기쁨과 감사의 잔치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우리가 죄에서 자유를 얻고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다는 기쁨의 경험이 된다. 성찬의 단어 ‘유카리스트(Eucharist)’는 ‘감사’를 의미하는 헬라어 ‘유카리스테오(εὐχαριστέω, thank)’에서 유래되었다. 
부활에 대한 감사와 사망 권세를 물리치시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찬양하는 잔치이자 축제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계 19:7-9)

셋째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와 나눔이다.
떡을 떼며 포도주를 함께 나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를 의미한다. ‘나눈다’는 것은 영어의 ‘커뮤니언(Communion)’으로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Koinonia)’이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과 한 몸을 이룬다는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6-17)

위의 세 가지 의미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성찬’의 진정한 본질적 의미다. 지금 한국 교회의 대부분의 성찬식은 첫 번째 의미인 ‘기념’ 의식만 실행되고 있다. 두 번째 감사와, 세 번째 교제와 나눔의 의미는 사실 거의 사라졌다. 성찬의 예식만 남은 것이다.

우리의 예배가 좀 더 성경적 본질을 회복하려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재림과 소망의 의미를 가장 강력하게 상징하고 있는 성찬의 회복이 시급하다. 그동안 역사 속에서 혹은 본질적인 의미의 간과로 인해 약화되었던 성찬은 수동적인 지금의 예배를 역동성의 예배로 이끄는 중요한 열쇠다.
성찬의 회복은 우리가 가진 초대교회의 유산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예배가 더 이상 매력이 없고 무미건조하게 생각하고 있는 다음세대의 젊은이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경험시켜줄 수 있는 원천이 될 수 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만 외칠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적용이 필요한 시점이다.

성경적인 성찬의 의미를 현대의 교회에도 다양하게 접목할 수 있는 고민이 필요할 때이다. 세속의 물결로 인해 영적으로 점점 약해져가는 교회가 새롭게 회복되기 위해선 예배가 좀 더 역동성을 갖춰야 하며, 상징을 통한 강력한 공동체 회복을 불러일으키는 성경적인 성찬의 회복이 우선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다음세대의 젊은이와 청소년들이 예배를 단지 의례적인 예식이 아닌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만드는 예배의 갱신이 지금의 교회들에게 시급하다고 믿는다. 교회의 미래가 다음세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교회의 갱신은 우리 가까이 있다.

예배의 변화 없이 교회의 갱신과 부흥은 없다. 그중 시급한 한 가지는 ‘성찬의 재발견’이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가진수

예배를 통한 교회의 갱신과 변화, 부흥에 비전을 가지고 있는 목회자이다. 그동안 여러 신학대와 대학원 등에서 현대예배와 영성, 예배인도 등을 가르쳤으며, 국내외 세미나와 예배학교 등에서 예배의 회복과 갱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현재 예배전문사역기관인 <글로벌 워십 미니스트리>의 대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