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예나’의 흑곰 여인숙에 출몰하다
루터, ‘예나’의 흑곰 여인숙에 출몰하다
  • 황희상
  • 승인 2019.05.0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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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지 탐방 동선상, 보름스를 보고 바르트부르크를 보고 비텐베르트 쪽으로 가게 된다면 중간에 들를만한 곳이 있다. 동선에 꼭 맞는 도시가 에르푸르트이다. 이 도시는 우리 종교개혁 탐방 시리즈에 포함되는 도시는 아니지만, 기왕 지나가는 동선에 있고, 도시 주변에 루터와 관련해서 들러볼 곳이 두어 군데 있으니, 가볍게 짚고만 가자.

에르푸르트는 루터의 어린 시절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도시다. 도보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과 수도원 내의 교회를 돌아보기. 루터가 수도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들어갔던 수도원은 생각보다 작았고, 내부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저 건물 어디엔가 루터가 생활했던 방이 있었을 것이다. 수도원 내 교회는 수도사로서 루터가 예배드렸던 곳. 돔 광장에서 멀리 에르푸르트 대성당을 보았다. 루터가 사제 서품을 받았던 곳이라고 하는데 규모가 굉장하다. 다만, 전체적인 종교개혁 탐방에서 중요도는 낮으니 여기서 시간을 오래 쓰지는 말자. (숙소 정도로 이용하고, 체크인 전후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돌아다니는 정도면 충분하겠다.)

교통이 자유로운 편이라면 “스토테르하임”이란 곳에 가보자. 허허벌판이라 이곳에 대중교통으로 가기는 어렵다. 이곳은 벌판 한가운데 교차로가 있고, 그 근처에 안내표지판과 루터의 돌이라 불리는 돌기둥만 덩그러니 하나 서 있는 애매한 곳이다. 이곳은 루터가 눈앞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무서워서 다급하게 성 안나에게 도와달라고 기도하며 ‘수도사가 되겠다’는 서원을 한 곳이라는데,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서 이렇게 기념공원까지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서 너무 여러 ‘설’이 있어서, 어떤 게 정확한지는 모를 일이다. 사실, 확인할 길도 없다.

0. 루터가 벼락을 맞고도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1. 루터가 벼락을 맞을 뻔했다.
1-1. 루터가 걷던 길 바로 앞에 벼락이 떨어졌다.
1-2. 루터 바로 앞의 나무가 벼락을 맞았다.
2. 루터와 함께 걷던 친구가 벼락을 맞았다.
2-1. 벼락을 맞아서 그 친구가 죽었다.
2-2.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을 뻔했다.
3. 수도사가 되는 것을 아버지가 반대하자 루터가 핑계 삼아 벼락 사건을 이야기한 것이다.
3-1. 루터가 지어낸 이야기다.
3-2. 폭풍우 속에서 두려움에 떨었던 실제 사건을 과장한 것이다.
4. 폭풍우 속에서 루터는 평소 지병이었던 간질이 발작하여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5. 이 모든 것은 후대의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다.
6. 슈토테른하임의 진실성?
6-1. 실제로 벼락이 떨어졌던 장소이다.
6-2. 대충 그 근처 들판에 돌 하나 세워놓고 관광 상품화한 것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좌우지간, 이 허허벌판까지 누군가는 찾아와서 돌기둥에 페인트로 적힌 "도와줘요, 성 안나! 내가 수도사가 될게요!"라는 문구를 보고 감동받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언제나 극적인 스토리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끄는 법. 하지만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은 이게 아니다. 오히려 조금 떨어진 곳에 답사팀이 가볼 만한 곳이 따로 있다.

 

예나의 흑곰 여인숙

 

독일엔 예나(jena)라는 도시가 있다. 에르푸르트까지 왔다면 일부러라도 잠시 가볼 만한 곳이다. 종교개혁지 답사 코스의 중간에 위치한 작은 이 도시는 올해의 주인공 "루터"와 관련이 있다. 루터가 황제와 가톨릭으로부터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신원을 감추고 바르트부르크성에 숨어지내던 시절, 그때 루터는 우리가 상상하듯 성 안에만 콕 박혀 지냈던 것은 아니었다. 융커라는 이름의 기사로 신분을 위장하고 밖으로 다니기도 했다. 그는 수염을 기르고 마을에 내려와서, 사람들이 루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넌지시 물어보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등잔 밑이 어둡다고) 비텐베르크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오가는 길이 안전할 수는 없었다. 루터는 신뢰할만한 숙소(아지트)가 필요했고, 그래서 그가 단골로 들러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했던 곳이 바로 예나에 있는 "흑곰" 여인숙이었다!

예나 시내 중심부에 있던 흑곰 여인숙. 지금은 그 자리에 호텔이 있다. 호텔측도 그런 사연을 잘 알기에, 호텔 로비의 대형 그림 속에도 수염을 기르고 변장한 루터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1층 로비 바로 옆 방을 루터를 기념하여 비워두고 있다. 이 방에 걸려있는 액자들은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서 신원을 감추고 생활하던 시절의 에피소드들을 묘사하고 있다. 답사 일정을 짤 때 이곳 호텔을 숙박지로 삼아보면 어떨까?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에서 머문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다만 이 호텔이 4성급이라서 조금 비싸다는 것이 문제다.

흑곰 여인숙에 얽힌 재미나는 이야기도 있다. 비텐베르크에 루터가 뜬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가다가 우연히 예나에서 머무르게 되었던 어느 교수와 제자가, 마침 거기 머물던 변장한 루터를 만났으나 못 알아본사건이다. 루터는 그들에게 신원을 감춘 채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짓궂게도 "루터"에 대해 들어봤냐며 은근히 떠봤던 것이다. 바르트부르크에 숨어 지내면서 자신이 세상에 얼마나 엄청난 일을 했는지 자못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고, 이제 곧 비텐베르크에 가야 할 텐데, 청중이 얼마나 호의적인지도 알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교수와 학생이 입에 침이 마르게 루터라는 인물을 칭찬했음은 물론이다. 아마 그날 밤 루터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꿀잠을 청했을 것이다.

 

이 호텔은 홈페이지를 통해 자신들의 "오랜 역사"를 홍보하고 있다. 필자가 흑곰북스라는 묘한(?) 이름의 출판사를 처음 설립했을 때, 많은 분이 그 정체와 유래를 궁금해하셨다. 이는 책날개에 적어둔 것처럼 칼뱅의 "기독교 강요" 초판을 찍어냈던 인쇄소 간판(흑곰 문양)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몇몇 분들은 예나의 흑곰 여인숙을 떠올렸다며 알려오셨다. 세상엔 이런 깨알 같은 정보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꼭 있다!

 

루터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자. 이제 우리의 시선은 같은 독일지역인 하이델베르크로 향한다. 이곳에서는 또 무엇을 보고 생각해야 할까. 다음 글에서는, 그 존재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아름다운 도성, 하이델베르크로 가보자.


황희상
기독교 교리, 역사, 교육 등의 책을 집필하는 작가이다. 『특강 소요리문답(흑곰북스)』과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지평서원)』은 한국교회에 교리교육의 열풍을 불러 일으킨 장본인이며, 최근 출간한 신개념 교회사 학습서 『특강 종교개혁사』는 장로교회 헌법의 기초가 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와 배경 및 결과물에 대한 현존 최고의 대중적 소개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