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자 돌보라”… 낙동강 물난리 이재민 구호 말씀 실천하다
“병든 자 돌보라”… 낙동강 물난리 이재민 구호 말씀 실천하다
  • 전정희
  • 승인 2019.02.0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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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외과학의 선구자 고명우 장로와 부산 구포
납북 실종자 고명우 장로가 1933년 낙동강 대홍수 때 의료구호 활동에 나섰던 부산 강서구 죽림동(당시 경남 김해군 가락면). 왼쪽으로 가락장로교회와 폐목욕탕 굴뚝이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서낙동강과 김해공항 활주로 일대다. 하늘에 비행기가 날고 있다. 낙동강 대홍수 당시 가락장로교회 일대를 빼고 모두 침수됐다.

낙동강 변 부산 구포역에 내리자 강은 보이지 않고 하늘을 가린 아파트와 도시철도 역사가 코앞에 있었다. 1905년 간이역으로 시작한 이 역은 1993년 ‘구포역 열차전복참사’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구포는 낙동강 김해평야의 강 동쪽 중심 읍내였다. 일제강점기 구포다리(1932년)가 생기면서 더욱 발전했다. 낙동강 하구는 강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먹고살았으나 강 때문에 재해를 입어 또 수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다.
 

고명우 (1883~1950)

1933년 7월 10일 오전 8시. 이 낙동강 하구 구포역에 미국 유학까지 다녀와 조선 외과학 명의로 꼽히는 고명우(1883~1950)가 도착했다. 부산·경남지역 유지와 기관장들이 그를 맞았다.

‘고 박사’로 불리던 그는 구포 땅에 도착해 짧게 기도했다. 그는 서울 남대문교회 장로였고 교회 옆 세브란스 의전 교수였다.

고명우 일행은 낙동강 하구 일대에 긴급 투입된 의료구호팀이었다. 그해 7월 초 5일간 계속된 태풍이 낙동강 하구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김해군(현 김해시 및 부산 강서구 일대)의 피해가 가장 컸다. 수천 명이 죽거나 이재민이 되어 김해읍과 구포 등지에 분산됐으나 역병 등이 돌아 수용도 쉽지 않았다. 이 자연재해는 이듬해에도 이 일대를 강타해 ‘낙동강 대홍수’로 기록됐다.

일제강점기 구포는 쌀 수탈을 위한 전략적 거점이기도 했다. 동양척식 등 각종 관공서가 자리해 조선 대중을 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 이에 항거한 소작쟁의가 구포 장날 행해졌고, 신분 해방을 위한 형평사 운동이 전개됐던 지역이기도 하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김정한 소설 ‘사하촌’, 조명희 소설 ‘낙동강’에는 소외되고 억압받는 조선 민중이 불의한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겼는데 그 무대가 낙동강 하구와 구포 소읍이다.

고명우와 의료진은 당시 민족주의 성향의 동아일보 등과 연합한 긴급 의료구호팀이었다. 고명우는 인솔자로서 김치환 정만유 김의순 등의 동료와 강 건너 김해군 가락면사무소 소재지를 베이스캠프로 활용했다. 지금의 가락면 죽도 왜성 산등성이다. 그들의 의료활동을 가락장로교회 등 교우들이 도왔다고 한다. 본부 및 숙소는 구포 대동여관이었다.
 

조선말 낙동강 하구 지도. 가운데 큰 섬과 작은 섬 등이 지금의 김해공항 활주로다(위 사진). 일제강점기 낙동강 대홍수로 제방이 붕괴된 모습. 구포다리가 보인다.

당시 김해 일대는 마치 쓰나미가 할퀴고 간 듯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가락면은 지금의 김해공항이 있는 강동동 대저동 명지동 등 6~7개의 섬을 포함하고 있었고 이 섬들 모두가 물에 잠긴 것이다. 일행은 배를 타고 다니며 이재민을 구조하고 치료했다. 신문은 ‘수천 명이 생사불명이며 열한 곳에서 1004명을 진료했다’고 보도했다. 이재민 대개는 외상과 피부병, 호흡기병 등에 시달렸으나 정작 수몰된 집과 논밭 때문에 상심이 더 컸다.

지난 16일 구포역에서 내려 구포다리를 지나 35m 높이의 죽도 왜성에 닿았다. 차로 20분 거리였다. 이 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내륙 침투를 위해 쌓았다. 현재 죽도 왜성 산자락을 중심으로 행정기관들이 들어서 있다.

당시 고명우와 의료진은 가락 포구에서 어선 등을 이용해 명지도 맥도 대저도 등으로 나가 응급 진료를 했다. 그와 동행한 의사들은 대개가 세브란스 의전을 나온 이들이었고 신앙의 동지들이었다.

고명우는 일찍이 교회를 중심으로 위생강연 등을 다니며 조선 민중의 각성을 촉구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철권통치로 암담한 민족 현실이 계속되면서 많은 지식인이 무력 투쟁을 위한 사회주의 계열로 빠져나갔으나 그는 신앙적 계몽운동을 최우선으로 보았다. 그래서 ‘보건’과 ‘위생’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 금강산 장안사 범종루에서 ‘전염병에 대하야’라는 위생강연을 할 만큼 생활 계몽에 앞장서곤 했다. 그는 서울 원효로 ‘고박사 의원’을 비워 가며 병든 자가 있는 곳이면 달려가곤 했다.
 

고명우(오른쪽)가 의료선교사 러들러 박사(가운데)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미국 유학시절로 추정된다(위 사진). 딸 고봉경(왼쪽)과 고황경 자매. 기독 엘리트 신여성이었다.

고명우는 황해도 장연 사람으로 조선의 자생적 교회 소래교회를 부모 등에 업혀 출석한 모태신앙인이었다. 고향 해서제일학교와 서울 경신학교에 다녔고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했다. 그는 의전 시절 “병든 자를 돌보라”는 말씀을 따라 서울 근교로 의료봉사활동을 다녔다. 그의 딸 고봉경(1950년 실종·피아니스트·이화여전 교수)과 고황경(1909~2000·기독 여성운동가)이 1940년대 서울 아현 너머 한촌(寒村) 세교리(현 서울 서교동)에 경성자매원을 설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봤던 것도 아버지 고명우를 따라 의료봉사활동을 다닌 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한다. 불행히도 고황경은 뛰어난 기독교교육가이자 사회사업가였으나 일제강점 기간이 길어지면서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활동하는 등 친일반민족행위를 하게 된다.
 

부산 구포역 뒤쪽 3·1만세운동길. 고명우는 한때 부산 선교병원에서 성장했다.

한편 고명우가 낙동강 이재민 구호 활동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것은 아버지 고학윤 조사가 1890년대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찰스 어빈(1862~1933)과 올리버 에비슨(1860~1956)의 한글 교사였는데 그 아버지가 두 선교사를 따라 부산으로 이거했기 때문이다. 고명우는 1896~1909년 부산에서 영어 등 근대 과목 교육을 받았고 선교병원에서 어빈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이런 그가 세브란스 의전에 진학한 것은 선교사들의 권유에서였다. 그때 미국 외과학의 권위자이자 의료선교사인 러들러 박사를 만나 ‘가난한 자를 위한 의술’을 배웠다. 고명우는 의전을 마친 후 고향 황해도 수안 금광 의무실에 근무하며 광부 가족을 위한 작은 교회와 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리고 1926년 세브란스병원장 에비슨의 권유로 미국 유학길을 떠나 뉴욕 롱아일랜드 의과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늘 겸손했던 그를 두고 러들러와 의료 선교사들은 “교회와 불우한 이웃을 사랑한 사마리아인” “한국 외과학의 선구자” 등으로 불렀다.

그러나 ‘예수의 복음을 품은 병 고치는 의사’는 민족의 참화를 피해 가지 못했다. 6·25전쟁이 발발했고 목숨의 위협을 알고도 교회와 병원을 지키려 했던 그는 딸 봉경과 함께 인민군에 끌려갔다. 남대문교회 장로 맹관호 김윤동 김동원 등도 같이 잡혀갔다. 납북 중 폭격에 사망했을 것이란 추측이 돈다.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불리던 고명우. 그는 고황경이 설립한 서울 노원구 서울여대 내 ‘고명우기념관’ 여섯 자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에 관한 연구가 없는 게 아쉽다.

 


전정희
국민일보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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