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나시우스의 생애
아타나시우스의 생애
  • 강도헌
  • 승인 2019.02.07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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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우스는 20세에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의 집사로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니케아 공의회의 목적은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항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타나시우스가 얼마나 신학적 소양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328년 알렉산더 감독이 사망하자 서른 살의 아타나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감독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주변에서는 이 나이 어린 알렉산드리아 감독에 대해 ‘검은 난쟁이’라고 비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통찰력과 지혜 그리고 용기에 지지를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즉,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된 이후 한평생을 격렬한 논쟁을 견디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아타나시우스는 373년 그가 사망할 때가지 45년 동안 알렉산드리아 대감독과 총대감독으로 일했고 자신의 생애 1/3(17년)을 유배지에서 보내야만 했을 만큼 아타나시우스는 전 생애 동안 격렬한 논쟁의 한복판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가 활동하였던 4세기 중엽(340년-380년)은 로마의 황제가 바뀌면 교리도 바뀌는 우여곡절의 시기였습니다. 즉, 아리우스주의로부터 정통주의로, 정통주의에서 반(半) 아리우스주의로, 그리고 다시 정통주의로 전환이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율리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으로부터 이교 신앙으로 전향을 하면서 로마 제국을 옛날 이교신앙으로 되돌리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정치와 같이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로마의 황제들은 평화를 원했고 제국의 통합이 최우선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반(反)아리우스파와 아리우스파의 치열한 패권싸움의 소용돌이를 잠재울 수 없었습니다.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와 ‘호모이오우시오스(유사본질)’의 단어 하나의 차이는 격렬한 다툼의 핵이었습니다. 즉, 로마황제는 반(反)아리우스파와 아리우스파 양쪽이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고 하나가 되기를 바라고 주도를 하였지만, 반(反) 아리우스파쪽에서는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설 수 없는 태도로 일관을 하였습니다. 그 중심에 바로 아타나시우스가 있었던 것입니다(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아타나시우스가 이 싸움을 즐겼다고 표현하기도 함).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로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는 단어였고, 이에 반해 아리우스파와 반(半)아리우스파는 ‘호모이오우시오스(유사본질)’를 선호하면서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아타나시우스가 오늘날까지 부각된 이유로는 니케아공의회 이후 40년 동안 아리우스파와 반(半)아리우스파가 로마의 황제를 중심으로 주도를 하는 가운데에서 일절의 타협을 거부하면서 다섯 번의 추방을 당하면서도 호모우시오스를 위해 싸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는 카파도키아 친구들(바실리우스와 두 명의 그레고리우스)이 도움을 받아 성부, 성자, 성령은 구별되지만 한 분 하나님의 본체(휘포스타시스)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성명서를 제안하게 됩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직접 주제한 362년의 이 회의는 에큐메니컬 공의회는 아니었지만,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위한 길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휘포스타시스’는 ‘본체’라는 의미의 단어로서 그리스어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단어는 ‘우시아(본질)’와 동의어 일수도 있고 혹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휘포스타시스’라는 이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목적은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한 본질(호모우시오스)이라 할지라도 같은 동일한 위격이나 실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을 반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한 인격적 하나님이 세 개의 가면이나 모습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지만 오리게네스처럼 아타나시우스도 유감스러운 유산을 함께 남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오리게네스와는 달리 아타나시우스의 명성은 모든 그리스도교 주요 교파들에게서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즉, 아타나시우스의 일부 의견들 중에서 정통 교리의 기준에 의해 이단적인 것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아타나시우스는 결코 이단으로 정죄되거나 비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373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을 하였습니다. 그의 생애 마지막 7년은 비교적 평화롭고 조용하게 그의 고향에서 감독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는데, 당시 로마 황제는 발렌스였습니다. 발렌스는 아리우스파 쪽으로 강하게 기울어져 있었지만, 아타나시우스가 한번 강제로 추방당한 이후, 발렌스는 아타나시우스를 동정한 나머지 고향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발렌스도 사망을 하였고, 그 뒤를 이은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친구들인 카파도키아 교부들이 옹호하였던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강력하게 지지하게 됩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제2차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소집한 사람이 바로 테오도시우스 황제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정통적이고 보편적인 로마 제국의 유일한 공적인 종교로 선언한 사람도 테오도시우스 황제입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위해 모든 준비를 하였지만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아타나시우스 신학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강도헌
제자삼는교회 담임,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프쉬케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