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기가 막혀!
성경이 기가 막혀!
  • 크리스찬북뉴스
  • 승인 2018.12.3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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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고 있다. ‘흥보가 기가 막혀’를. 처음 듣는 순간 기가 막혔다. 전통 국악과 버무려 만든 이 노래는 95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금상을 수여했다. 그 이후, 수년 동안 히트곡이 되었다. 아! 이 노래를 모르다니. 그렇다면 그대는 진정 신세대로구나. 아니, 내가 구세대인가? 중요한건 ‘흥부’가 아니라 ‘흥보’라는 점. 오래 전 ‘김일이를 아는가? 안다면 그대는 쉰 세대’라는 문구를 읽은 적이 있다. ‘전설의 박치기 대장을 모르다니? 그게 인간이가?’ 했던 적이 있지만 교회 청년들에게 물으니 백오십 명이 넘는 청년 중에 유일하게 한 명 안다고 손들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하도 ‘김일이’ ‘김일이’ 해서 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내 나이도 쉰을 바라보고 있다. 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제목을 ‘성경이 기가 막혀!’로 적고나니 ‘흥보가 기가 막혀’에서 ‘김일이’까지 넘어가고 있으니 나이 먹은 표를 내고 말았다. 이제 책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젊은 책이다!

‘젊다!’ 책을 펼쳐든 순간 생각의 여유도 없이 쏜살처럼 나의 마음을 점령한 느낌이다. 김동문 선교사의 글은 언제나 흥미롭다. 성경이 말하는 원의(原意)를 삶의 맥락을 통해 짚어 내주는 분이다. 4년 전에 포이에마에서 출간된 <오감을 성경 읽기>는 영혼을 매료시키는 힘을 가진 책이다. 현지의 사진과 김동문 선교사의 해석은 멋과 맛을 더해 준다. 그럼 이 책은? 한 마디로 ‘기가 막힌 책이다.’ 김동문 선교사의 해설은 잘 우려낸 육수처럼 단순하면서 깊이가 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원의에 근접하게 도와준다. 첫 느낌이 ‘젊다’고 했다. 신현욱 목사의 그림 때문이다. 글도 글이지만 그림이 기가 막히다. 글을 읽고 그림을 보는 순간 무릎을 ‘탁’치고 만다. 세상에 이럴 수가. 어찌 이리도 기가 막히게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책을 읽지 않고는 이 느낌을 모를 것이다. 흥보가 기막힌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기가 막힐 책이다. 여기서 기가 막히다는 말은 어이가 없거나 황당해서가 아니라 탁월해서 기가 막힌 것이니 오해 없기를. 난 이 책을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인디아나 존스>와 견주고 싶다. 고고학자인 인디아나 존스는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발견하지만 결국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기 일쑤다. 그러나 모험의 여정은 세상을 다시 보도록 안목을 광대하게 넓혀 준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중근동 지방에 체화된 안목에서 길러낸 해석과 무릎을 치게 만드는 그림을 읽다보면 어느 새 마지막이다. 성만 다를 뿐 이름은 나와 똑같은데 어찌 이리도 그림을 잘 그린단 말인가?

낯설게 읽기

저자는 이 책의 의도를 ‘낯설게 읽기’라고 말한다. 낯설게 읽기는 이미 다 알기 때문에 기존에 가진 편견이나 선입관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 대하는 것처럼, 낯선 대상을 경계심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성경의 이야기들은 편견인 경우가 적지 않다. 가장 비근한 예로 솔로몬의 일천 번제를 예로 들어보자. 저자는 현대 교인들이 아는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관용적 표현에 대한 문자적 해석이 낳은 오해’라고 말한다. 로뎀나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로뎀나무는 엘리야가 쉬었다 간 곳이라 평안과 안식의 장소로 생각하지만 전혀 아니다. 로뎀나무는 일종의 가시나무이며 그늘이 만들어지지 않는 곳이다. 저자는 로뎀나무 아래에 ‘쉼과 안식이 없다’고 말한다. 어디 그뿐인가? 음탕한 고멜로 알려진 호세아의 아내는 진짜 음탕한 것이 아니다. 이처럼 성경을 고민하고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다양한 주제들을 중근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바로 잡아준다.

낯설게 읽기의 저의는 ‘재고(再考)’하라는 말이다. 사람은 낯선 대상을 만날 때 경계한다.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대상을 파악하기 위해 오감을 동원한다.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모두 주의하여 보고 파악하고 종합하여 해석한다. 그러나 익숙해지는 순간 경계를 늦추고 이미 아는 전례대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우리는 이것을 선입견이라고 말한다. 선입견은 효율적이고 즉각적이다. 차가 오면 피하고, 택시가 오면 문을 열고 탄다. 아무런 경계도 고민도 하지 않는다. 익숙하기 때문이다. 익숙해지는 순간 세계는 경이를 잃어버린다. 식상한 세계는 권태롭게 한다. 성경이 재미없는 이유는 ‘다 알기 때문’이다. 다 아는 성경을 왜 읽어야 하는가? 권태는 신뢰가 아니라 우상숭배이다. 타성에 젖은 이성과 믿음은 하나님을 식상한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새롭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는 변하지 않으시되 모든 것을 변화시키시며,
새롭게 되거나 옛것으로 돌아가지 않으시되,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주 야훼의 사랑 다함 없고 그 자비 가실 줄 몰라라.
그 사랑, 그 자비 아침마다 새롭고 그 신실하심 그지없어라. (공동번역: 애가 3:22-23)

궁극적으로 성경의 ‘새롭게 읽기’는 하나님의 재발견이며, 날마다 다함이 없는 자비와 사랑에 대한 창조적 경외인 셈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안다면,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저자는 독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의 편견과 오해를 버리고 성경의 시대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을 권면한다. 물론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최소한 그 당시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 당시의 문화와 생활을 알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책은 식상해진 성경을 ‘낯선 하나님의 경외’로 인도하기에 안내서와 같다.

낮은 자의 하나님

흥미롭게도 저자는 낯설게 읽기의 이유이자 목적을 ‘낮은 자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최근에 유행했던 흙수저 인생, 변방의 사람들, 소외된 존재들에 대해 하나님은 관심을 갖게 계신다고 성경은 말한다. 첫 장인 ‘인류를 향한 첫 번째 권리 선언’에서는 창세기의 창조와 이야기와 수메르 신화의 창조 이야기를 비교한다. 성경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존재로 그려낸다. 하지만 수메르 신화는 상급신과 하급신을 나눈다. 지혜의 신인 엔키는 진흙에 자신의 피와 정액을 섞어 인간을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간은 고된 노동을 위해 창조되었다. 고대세계에서 인간은 ‘신들도 감당하기 힘든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19쪽)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빚으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성경의 인간과 얼마나 다른가.

윤일권.김원익이 공저한 <그리스로마 신화와 서양문화>(알렙)에서 고대의 신화는 ‘사회적 변천 과정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고’(48쪽)고 말한다. 조지스 캠벨 역시 고대 신화가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주장한다. 즉 신화를 통해 왕이 백성들을 지배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저자는 성경과 고대중근동의 신화를 비교하며 예리하게 통찰한다. 이스라엘이 노에 생활을 했던 애굽은 왕 바로는 살아있는 신이다.

“이런 세계관은 신의 화신이자 대리자인 왕에게 절대 권력을 주었다. 철저한 신정 국가였던 메소포타미아에서 인간은 날 때부터 신의 지배를 받아야 했고, 신적 존재인 왕의 가르침과 다스림이 필요한 그저 잠재적인 반역자일 뿐이었다.”(20쪽)

하나님은 낮은 자들을 만나러 이 땅에 오신다. 성경의 여자를 보라. 그는 남자와 동등하다. 또한 사람은 흙과 같은 미천한 존재였으나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워진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누구인가? 누구도 여행하지 않는 시간인 정오에 세 나그네를 만나 환대한다. 아브라함의 환대는 간단한 간식이나 식사 대접이 아니었다. 왕의 만찬을 능가하는 최고의 대접이었다. 이삭을 드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상실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이들로 치환된다.

“자연 재해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가족이 해체되고, 삶이 무너졌을 때 믿지 않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라고 단언하는 성경 읽기가 온당한 성경 읽기일까? 우리는 이삭이 갖게 된 고통스런 기억을 아파하는 하나님도 묵상해야 한다.”(62쪽)

이것이 성경을 ‘낯설게 읽기’이며, ‘낮의 자의 하나님’을 만나는 성경 읽기가 아닐까?

나가면서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신다’고 표현한다. 상은 밥상, 잔칫상을 말한다. 즉 풍성한 먹을거리를 제공하신다는 것이다. 문제는 상은 왕이나 귀족들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것이라는 점이다. 상은 곧 최고의 우대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최고의 자리에 앉히실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낮의 자의 하나님을 만나는 성경 읽기’란 ‘성경의 재발견’ 또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기’이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스스로 타락하여 낙원과 영광을 잃어버린 죄인들을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태생이 천하다. 하나님의 영광이 벗겨지는 순간 흙일 뿐이다. 흙은 인간의 실체이자 본질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창조하셨고, 사랑하신다. 그리고 찾아오신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가시덤불에 찔리고 상처난 예수님에 대한 찬양 297장은 성경의 거대담론을 노래한 것이다.

1. 양 아흔아홉 마리는 울 안에 있으나 한 마리 양은 떨어져 길 잃고 헤매네 
   산 높고 길은 험한데 목자를 멀리 떠났네 목자를 멀리 떠났네

2. 그 아흔아홉 마리가 넉넉지 않은가 저 목자 힘써 하는 말 그 양도 사랑해 
  그 길이 멀고 험해도 그 양을 찾을 것이라 그 양을 찾을 것이라

3. 길 잃은 양을 찾으러 산 넘고 물 건너 그 어둔 밤이 새도록 큰 고생 하셨네 
   그 양의 울음소리를 저 목자 들으셨도다 저 목자 들으셨도다

4. 산 길에 흘린 피 흔적 그 누가 흘렸나 길잃은 양을 찾느라 저 목자 흘렸네 
   손 발은 어찌상했나 가시에 찔리셨도다 가시에 찔리셨도다

5. 저 목자 기쁨 넘쳐서 큰 소리 외치며 내 잃은 양을 찾았다 
   다 기뻐하여라 저 천사 화답하는 말 그 양을 찾으셨도다 그 양을 찾으셨도다

용두사미(龍頭蛇尾)라고 했다. 글을 쓰다 보니 너무 진중해져 버렸다. 이 책은 기가 막히게 재미있고, 진중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아닌 참을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의 무거움을 느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 없이 나를 가볍게 하지만, 그 무게는 측량할 수 있는 저울이 없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다음 문장을 읽고 마치련다.

“낮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성경 읽기가 꼭 필요한 시대다.”(257쪽)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 구약편/김동문 글 신현욱 그림/선율


정현욱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본 서평의 저작권은 크리스찬북뉴스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