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여성계 대모 공덕귀 전도사와 경남 통영
한국기독여성계 대모 공덕귀 전도사와 경남 통영
  • 전정희
  • 승인 2018.12.06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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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警 겁박에 정신이 더 맑아졌다… 성령이 주신 용기
공덕귀 전도사가 어머니와 함께 새벽제단을 쌓았던 통영 충무교회 첨탑. 첨탑 왼쪽은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머물던 통제영이다. 한 마을 사람이 텃밭을 가꾸고 있다.
공덕귀 전도사가 어머니와 함께 새벽제단을 쌓았던 통영 충무교회 첨탑. 첨탑 왼쪽은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머물던 통제영이다. 한 마을 사람이 텃밭을 가꾸고 있다.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남몰래 시를 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난주 한국기독여성계의 대모 공덕귀(1911~1997) 전도사 생가를 찾아 경남 통영 서피랑길 골목을 구석구석 돌다가 마주한 글귀다. 그 골목 담벼락에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문장이 쓰여 있었다. 두 사람의 집은 불과 300m 거리였다.
 

공덕귀(1911~1997)
공덕귀(1911~1997)

공덕귀는 4·19혁명 직후 취임한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로 기억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한국교회는 그를 서울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한 기독 여성운동가로 기억한다. 그는 생전 교회여성연합운동, 순교자기념사업운동, 인권운동, 통일운동, 피폭자 지원과 기생관광반대운동 등에 한평생을 바쳤다.

통영은 제주 못지않은 ‘핫 플레이스’다. 미항이 갖는 매력과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중섭, 작가 유치진 유치환 박경리 김상옥 등 숱한 문화예술인이 나고 활동한 예향이다. 또 통영이란 이름은 이순신이 최초 삼도수군통제사로 있었던 통제영(統制營)에서 따올 만큼 역사성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그 통제영의 객사 세병관에 서면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통영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통영을 즐기려는 관광객을 실은 버스가 끊임없이 주차장을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가까이 고딕양식을 본뜬 교회 종탑이 눈에 들어온다. 호주선교부에 의해 1905년 설립된 충무교회다. 적어도 통영을 찾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세병관 맞은편 이 교회에 들러 순례자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충무교회 입구 교회 역사기록 기념석. 공덕귀 이름도 새겨져 있다.
충무교회 입구 교회 역사기록 기념석. 공덕귀 이름도 새겨져 있다.

충무교회 입구에 서면 기념석 하나가 눈길을 끈다. ‘암울한 19세기 말 통영 복음화를 위해 설립된 충무교회는 3·1독립만세와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신앙훈련과 근대교육을 통해 종교 정치 문화 예술계의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했는데 그중에는 유치환 박경리 김춘수 김상옥 윤이상 공덕귀 여사 등이 있다.’ 공덕귀는 태중에서부터 소천까지 교회 공동체를 반석으로 삼은 인물이다. 그가 남긴 생전 기록.

‘주일이면 어머니는 절대 일을 안 했다. 새벽기도에서부터 주일이 시작됐다. 어머니는 딸들을 곱게 단장시켜 앞세우고 교회로 갔다. …(교회 부설) 진명유치원에 도착하면 호주에서 온 신나 선교사가 풍금을 치면서 찬송과 성경공부반을 인도했다. 그 어릴 때 본 광경을 잊을 수 없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진명유치원 원아들과 찍은 사진. 맨 윗줄 왼쪽 두 번째부터 공덕귀, 최덕지 목사, 스키너 선교사, 유치환 부인 권재순. 충무교회 제공
진명유치원 원아들과 찍은 사진. 맨 윗줄 왼쪽 두 번째부터 공덕귀, 최덕지 목사, 스키너 선교사, 유치환 부인 권재순. 충무교회 제공

그의 어머니 공마리아(서양식 세례명)는 야소학(예수교)을 믿는다는 이유로 보리쌀 두 되를 들고 시할머니로부터 쫓겨난 여인이었다. 보아스가 보리쌀 여섯 되를 룻에게 주어 돌려보냈다는 대목이 상기된다. 기도 끝에 공마리아는 다시 시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철저히 말씀 안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국문을 깨쳐 마을사람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기도 했다. 어린 덕귀는 어머니의 새벽기도회 참석 길을 따라 새벽이슬과 거미줄을 헤쳐 나갔다.

‘그렇게 교회에 도착한 나는 맨 뒤에 앉아 기도를 드렸다. 꼬마가 무슨 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드렸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시작된 기도생활은 여학교 가서도, 요코하마여자신학교에 가서도 계속되었다.’
 

경남 통영 충무교회. 공덕귀는 교회 뒤편 산 너머에 살았다.
경남 통영 충무교회. 공덕귀는 교회 뒤편 산 너머에 살았다.

충무교회 뒤편으로 야트막한 산이 자리한다. 지금이야 그 산 아래 골목이 관광지가 됐지만 어린 덕귀가 그 산을 넘어 교회에 이를 땐 도깨비가 나온다는 길이었다. 교회를 나와 세병관에서 서문로를 따라 북쪽을 오르다 보면 충렬사에 이른다. 이순신 관련 유적이다. 신나 선교사 등이 어린이 전도를 위해 운영했던 옛 진명유치원 터는 충렬사 가는 길 중간쯤 삼거리 부근이다. 지금의 충무삼일교회 인근이다.

서피랑벽화마을 골목을 돌던 중 직감적으로 공덕귀 생가 골목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두 사람이 비켜 가야 할 만큼 좁은 길. 벽화와 문학 문구가 담벼락마다 이어졌다.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 윤보선 영부인 공덕귀 살았던 곳’이라는 기념석과 함께 설명문이 그 옆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교육자, 여성운동가로 구속자가족협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원폭피해자와 평생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삶을 살았다.’

이를 풀어쓰자면 그는 조선신학교(한신대 전신) 교수였고,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등을 이끈 여성운동가였으며,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모금한 평화헌금을 한국원폭피해자 가족을 위해 쓴 기독NGO 활동가였다. 또 기독교여성단체 리더로 버스안내양, 여성 방직노동자, 도시빈민을 보살핀 우리 시대의 어머니였다.

공덕귀를 추모하고 그의 삶의 터에 이처럼 기념석을 남긴 지방자치단체에 감사했다. 한편으로 한국교회사의 초대교회 신앙의 흔적조차 찾지 못하는 한국교회가 밉기도 했다.
 

1940년대 통제영 세병관과 학생들. 세병관은 보통학교 건물로 쓰였다. 공덕귀도 이 학교에 다녔다. 국립민속박물관 자료
1940년대 통제영 세병관과 학생들. 세병관은 보통학교 건물로 쓰였다. 공덕귀도 이 학교에 다녔다. 국립민속박물관 자료

공마리아는 삯바느질로 덕귀 등 6남매를 키웠다. 대한제국 마지막 군인이었던 남편 공도빈은 덕귀가 열다섯 무렵 죽었다. 평생 교회 나간 일이 없는 공도빈은 어느 날 밤 자다 말고 깨어나 “하나님 이 공도빈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한 것을 끝으로 세상과 작별했다. 30대 중반 홀로된 공마리아는 한 동리에서 자랐던 최덕지(1901~1956) 목사 등과 경남 여전도회를 중심으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렀다. 훗날 공마리아는 재건교회 장로가 됐다.

이런 어머니는 공덕귀를 부산 일신여학교(동래여고 전신)로 진학시켰다. 기숙사에서는 애국가를 불렀고,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으로 공부하는 미션스쿨이었다. 교사들이 복도에서만큼은 일어를 써달라고 통사정하곤 했다. 그는 이때 인도 선교사를 꿈꿨다. 당시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장 김필례(1891~1983) 선생이 일신여학교 새벽기도회(청신회)에 참석해 인도선교 이야기를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김필례는 그 무렵 인도에서 열리는 세계기독청년대회 한국 대표로 참석한 바 있다.

공덕귀는 일신여학교 시절 코틀 등 호주 선교사 등과 함께 경남 진주 거창 등지로 전도여행을 다녔다. 이때 거창교회 성탄절 이브행사에서 이런 가사의 독창을 했다.

‘무궁화 삼천리 내 집인데 어디어디를 가오/ 봄오면 무궁화 필터인데 어디어디로 가오/ 현해탄 물결이 높다는데 어디어디로 가오.’
그리고 며칠 지나 거창경찰서의 소환을 받아 유치장에 수감된다. 교회 독창곡 때문이었다.

공덕귀가 두 번째로 옥살이를 한 것은 순교자 송창근(1898~1951) 목사 주선으로 일본 요코하마여자신학교로 유학 후 전도사가 돼 경북 김천 황금동교회에 부임한 1940년 무렵이었다. 어느 날 부흥집회가 끝나자 대구의 도경찰서에서 그를 잡아들였다. 
 

공덕귀 전도사가 해방 전 섬겼던 예장통합 측 경북 김천 황금동교회.
공덕귀 전도사가 해방 전 섬겼던 예장통합 측 경북 김천 황금동교회.

하야시라는 서장은 ‘김천 황금동교회 독립운동사’라고 적힌 서류철을 내밀고 정대위(독립유공자) 목사 등의 설교를 문제 삼았다. “전쟁을 위해 교회 종을 바칠 때 집사들이 울었다는데 그게 누구냐”고 겁을 주었다. ‘그럴수록 나는 정신이 맑아졌다. 성령이 내 곁에 계셔서 나에게 용기를 주신 것에 틀림없다.’

하야시와 일경은 그가 말을 듣지 않자 고춧가루 탄 물로 고문을 가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이 쏟아졌다. 그들은 교회 상황을 보고하라 협박한 후 풀어줬다. 당시 황금동교회는 송창근 목사를 중심으로 조선출 정대위 김재준 김정준 강익형 등 내로라하는 교계 민족운동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공덕귀는 탄압을 피해 요코하마여자신학교로 피신했다. 미군 B29가 도쿄만 일대를 날아다니는 전쟁 공포 속이었다. 일본 문부성 정식 전문학교령에 따라 요코하마여자신학교는 동경여자신학전문학교가 됐고 그는 그 과정을 마치고 황금동교회로 재부임했다. 

공덕귀 전도사가 살았던 통영 집터에 세워진 기념석과 안내판.
공덕귀 전도사가 살았던 통영 집터에 세워진 기념석과 안내판.

그리고 해방 후 서울로 올라와 조선신학교 여자신학부 전임강사가 됐다. 여자신학부는 한경직 목사, 송창근 김재준 목사, 김대현 장로 등이 뜻을 같이한 결과였다. 한 목사는 여신학부 부장이었고 베다니교회(서울 영락교회 전신)를 막 시작하던 때였다.

그렇게 교회를 섬기고 신학을 가르치다 보니 어느덧 30대 후반이 됐다. 그는 인도 선교사로 가기 위해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유학 준비를 했다. 송창근 목사는 말렸고 김재준 목사는 응원했다. “하나님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한 내 기도가 나를 결혼으로 몰고 갔는지 나는 결국 결혼하게 됐다”고 했다.

1949년 1월 6일. 서른아홉의 공덕귀는 신앙의 명가 윤보선의 안국동 자택에서 함태영(독립운동가·부통령) 목사 주례로 혼인예식을 치른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한 지혜와 믿음의 여인 미리암과 같은 삶을 살게 되는 전환점이 되는 결혼식이었다. 

원폭 피폭자 보듬은 ‘공덕귀 회장’
1970년대 초 한국에 원폭 피해자가 2만여명이나 있었다. 실태 파악도 안 된 때였다. 그때 공덕귀 한국교회여성연합회장은 경남 합천 등으로 피폭자를 찾아다니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 일본 한국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던 때였다. 그와 교회 여성들은 일본교회협의회와 세계 기독여성들에게 이 비참한 상황을 알리고 일본 정부에 배상을 요구했다.

피폭자 자녀로 태어난 인천의 주명순(당시 30대)씨는 캄캄한 다락방에서 평생을 살았다. 원자병이 대물림된다 하여 숨겼기 때문이다. 주씨는 ‘밥’ ‘물’ 정도 외에는 말할 줄도 몰랐다.

교회 여성들은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를 창립해 이들을 도왔다. 그리고 ‘반전 반핵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라는 걸 분명히 했다.

1949년 서울시장 윤보선과 결혼
1960년 윤보선 대통령 취임. 영부인이 됨
1962년 박정희 쿠데타로 윤보선 하야
1965년 순교자기념사업회장
1973년 원폭 피해자 지원운동
1976년 양심범가족협의회장
1977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장·방직여성노동자 투쟁 지원
1983년 한국기독교100주년사업협의회 여성분과위원장
1986년 교회일치여성협의회 초대회장
1990년 사랑의쌀나누기운동본부 실행위원



전정희
국민일보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