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해법, 오직 성경으로
한국교회의 해법, 오직 성경으로
  • 크리스찬북뉴스
  • 승인 2018.11.26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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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이벤트가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았는가?”

책의 뒤표지에 간판처럼 실린 이 문장은 이 책의 핵심이자,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짧지만 강력한 저자의 외침을 들을 수 있다면 ‘헬조선’과 ‘개독교’로 지칭되는 한국과 한국교회 안에서 대안을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모두 5부로 분류하여 종교개혁 시대에 일어났던 인문주의 운동을 탐색하고, 마지막에 한국교회와 기독교 인문주의와의 연관성을 찾아 대안을 모색한다.

헬조선과 기독교
정도전을 알리기 위해 디시인사이드에서 시작된 ‘헬조선’이란 표현은 극기야 한국 전반에 걸친 현상을 표현하는 유행어가 되었고, 모두가 공감하는 적절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헬조선은 청년실업과 맞물리면서 사회 전반적인 현상을 파악하는 용어로 안착했다. 더불어 생겨난 수저 시리즈는 아직도 유효하다.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라는 용어는 소유와 권력에 상응하는 사람들의 삶의 형태를 지칭한다. 차마 입에 담기는 힘들지만 종종 ‘똥수저’라는 단어도 사용된다. 이러한 수저 시리즈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소유와 학력 등에 의해 화석화된 신분을 말한다. 즉 부모의 능력 차이에 의해 자녀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고정’된다는 말이다. 최근에 일어나는 ‘노력의 배신’이나 아무리 노력해도 가망이 없다는 조롱 섞인 ‘노오오오력’이란 단어들은 헬조선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출생과 함께 부모의 직업, 경제력 등에 따라 본인의 수저가 결정된다는 이론으로서 흙수저는 ‘부모의 능력이나 형편이 넉넉지 못한 어려운 상황에 경제적인 도움을 전혀 못 받고 있는 자녀를 지칭’한다.”(p.13)

인문주의란 무엇인가

이제 헬조선 이야기와 개독교를 넘어 2, 3부에서 그려내는 인문주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저자는 간략하게 인문주의에 관련된 사건들을 추적하면서 인문주의가 종교개혁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를 찾는다.

인문주의는 르네상스(Renaissance)를 떼놓고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인문주의 자체가 Renaissance 운동의 주요한 성향이기 때문이다. 표준국어 대사전은 이렇게 정의한다.

르네상스 [프랑스어] Renaissance

14세기~16세기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화 혁신 운동. 도시의 발달과 상업 자본의 형성을 배경으로 하여 개성ㆍ합리성ㆍ현세적 욕구를 추구하는 반(反)중세적 정신 운동을 일으켰으며, 문학ㆍ미술ㆍ건축ㆍ자연 과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유럽 문화의 근대화에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

위의 정의에서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화 혁신 운동’에 방점을 찍어보자. 종교적 의미에서 르네상스 운동을 재정의 한다면 신학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학문을 일구어내려는 운동으로 정의해도 될 성싶다. 중세와 가톨릭, 교황의 권위라는 그릇된 종교적 정치형태와 결코 무관하지 않음에도, 르네상스 운동 자체는 신에게서 해방하려는 인간의 자유 갈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처음부터 신으로부터의 자유를 부르짖지 않았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저자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이 ‘신실한 기독교인들’(p.45)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세속적 르네상스 운동이 고대 헬라로 돌아갔다면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초대교회 교부 문헌으로 되돌아갔다. ‘고대에 찬미의 대상이었던 인간의 육체와 지성’(p.48)이 바로 중세 교회가 억압하고 퇴보시킨 것들이었다. 르네상스 운동은 정확하게 이러한 것들을 되찾는 운동이었다. 고대의 정신을 되찾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작업은 고대의 문헌을 회복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르네상스 운동은 인문주의 운동으로 우회한다. 인문주의 운동은 부수적으로 다양한 변화와 결과를 가져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콘스탄티누스의 기부>가 8세기에 위조된 문서인 것을 밝힌 것이다.

궁극적으로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인간을 비관적으로 일관했던 중세의 스콜라주의를 뛰어넘어 ‘하나님, 신앙,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고대의 재발견을 통하여 낙관적 인간론을 회복’(p.50)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회복의 의미보다는 인문주의자들이 ‘실천적 현실적인 사람들’(p.51)이었다는 짤막한 구절에 강조점을 두고 싶다. 조선의 18세기 실학자들이 진정한 학문은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어쩌면 르네상스 운동과 인문주의는 현실에서 너무 멀리 떠나버린 하나님을 되찾으려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9세기 이후 중세 교회는 과도한 신학과 신비주의에 몰입되어 현실을 평가절하 시킨다. 인문주의는 궁극적으로 삶을 도외시한 중세 교회를 향하여 ‘사람들은 누구이며 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자 답이다.

3부에서는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대립했던 에라스무스를 다룬다.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단 몇 문장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몇 가지만 추려보자. 그는 교부 문헌을 발굴하고 교정했다. 그동안 필사자들에 의해 기록된 수많은 사본들이 나돌았다. 에라스무스는 다양한 사본들을 비교 분석함으로 비평학의 지평을 열었다. 후대에 일어난 고등비평은 이미 에라스무스와 그 이전의 인문주의자들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는 이러한 비평 작업을 통해 그릇된 교회의 권위를 걷어내고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주장한다. 히에로니무스의 불가타 역의 오류를 지적하고 폭로함으로 불가타 역에 의존했던 교회의 권위는 지축이 흔들렸다. 이러한 연구는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성경으로’라는 기치에 영향을 주었음을 두말할 필요도 없다.

홀바인의 에라스무스 [출처, 위키백과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홀바인의 에라스무스 [출처, 위키백과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인문주의와 한국교회

4부를 건너뛰어 곧장 5부로 넘어가 보자. 결론에 해당하는 이곳에서 저자는 네 가지의 주제로 분류하여 당연하면서도 중요한 결론을 제시한다. 먼저는 헬조선에서 인간의 가치를 선포할 것, 둘째는 기독교의 근원인 ‘성경으로 돌아가라’는 것, 셋째는 세상과의 소통, 넷째는 신학자들을 향하여 저항하는 지식으로 발언하라는 것이다. 네 개로 분류되어 있지만 결국은 하나다. 성경으로 돌아갈 때 인간의 가치는 되찾게 될 것이다. 성경으로 돌아갈 때 세상과 세속의 가치에 휘둘리지 않고 혁명적 사유를 통해 정하는 신학자가 될 것이다.

“해법은 교회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교리와 관행 위에 성경을 두는 것이다. 성경 앞에서 모든 것을 상대화하여 이교적 세속적 요소를 제거하고, 교회 안에서 주인 행세하는 우상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성경에 대한 진지하고 정직한, 그리고 철저한 연구와 묵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p.100-101)

책은 목차까지 합해도 백십 쪽 분량의 소책자이다. 그러나 저자가 의도하는 핵심을 잘 짚어낸다면 현대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문제를 간파할 힘과 저항하는 힘을 갖게 되리라 확신한다.

한국교회, 인문주의에서 답을 찾다/배덕만/대장간
한국교회, 인문주의에서 답을 찾다/배덕만/대장간

정현욱
크리스찬북뉴스 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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