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그래픽 아티스트 구승회 사진전 'Name_이름의 이름' ]
[포토그래픽 아티스트 구승회 사진전 'Name_이름의 이름' ]
  • mytwelve
  • 승인 2018.11.16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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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상

 

[포토그래픽 아티스트 구승회 사진전 'Name_이름의 이름' ] (인터뷰 영상)

NAME 전은 구상부터 전시까지 약 3년의 시간이 걸린 전시입니다. 작가는 이름의 회복을 통한 존재와 관계에 대해 섬세하게 설명합니다.
 

_전시 장소포토그래퍼스 갤러리 코리아(서울특별시 은평구 증산서길 65 / 070-4655-5753)
_전시 기간2018. 10. 2(화) - 11. 17(토) 11 a.m.- 6 p.m.갤러리 휴관 - 일요일, 월요일

 

[작가 노트]

이름은 무엇인가?

모든 만물은 이름을 갖고 있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성경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의 내용을 통해 이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 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 하셨다. 말이 곧 실재가 되어 존재가 탄생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어는 창조의 언어이고 모든 만물에는 언어적 본질이 내재 되어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그러한 존재를 보고 그 존재 안에 담겨있는 본질이 드러나도록 이름을 지었다. 따라서 신의 언어가 창조의 언어라면 아담의 언어는 존재를 언어로 번역하는 이름의 언어였다. 만물 안에 그것의 본질이 언어로 내재 되어있기에 인간은 모든 대상을 ‘나와 너’로서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후 인간이 타락해 가는 과정에서 인간의 언어가 변질된다. 사물의 본질에 일치하는 이름의 모습이 사라지게 되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를 짓게 되었고 타락한 인간의 언어는 이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일컫는 언어가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어 다른 것들을 판단하는 판단의 언어로 변모한다. 여기에서 언어에 대한 변질은 인간과 모든 대상과의 관계에 변화를 일으킨다. 이제 모든 관계가 ‘나와 너’라고 하는 인격적인 관계가 아닌, ‘나와 그것’의 관계 즉 나의 필요에 의해 맺어지는 비 인격적인 도구적 관계로 변질된다 결국 인간은 “우리의 이름을 우리가 짓자”라고 하며 바벨탑을 쌓는다.

이름은 누군가 불러줌으로 그 사람과 인격적 관계를 맺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제 인간은 자기들이 스스로 짓는 인격적 관계가 사라진 이름을 짓는다 이 후 인간의 언어는 단순 기호화 즉 도구화 되었으며 이름은 이제 본질이 드러나는 고유명사로서의 모습을 상실하고 개별자를 보편화 시키는 일반명사화(추상화)로 되어버린다 하지만 언어는 인간이 세상에 만들어 지기 전에 이미 있었고 인간이 도구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언어 속에서 살아 가는 것이다

언어학자인 소쉬르가 이야기하는 언어의 기호는 기표와 기의라는 구조를 통해 이루어져있다. 판단의 언어를 사용하게 된 인간은 존재론적인 연관성이 결여된채 인간이 만물에게 부여하는 자의적 기호 행위로서의 이름을 지어줄 수 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만물에게 폭력을 가하게 되어 만물에 내재한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게 만들고 존재와 대상에 대해 본질과는 다른 언어(기표)를 사용하게 됨으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가 생기게 된다

따라서 난 이 작업을 통해 우리가 이름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며 현실에서 왜곡 되어진 이름을 회복해 보고싶다. 대상으로는 자본주의시대 시뮬라크르의 구조 속에 관리와 교환가치의 수단으로 수치화, 추상화 되어져 있는 것들의 이름을 회복하려한다

그 첫번째 오브제로 레고브릭을 선택하였다. 이유는 레고는 수 많은 레고브릭 하나하나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레고라는 이름을 생각하며 레고브릭 하나를 떠올리진 않는다.아이러니 하게도 레고브릭 하나에는 레고라는 이름이 선명히 새겨져 있음에도 말이다. 레고브릭은 각각 목적을 위해 모양과 쓰임으로 분류 되어져 있다. 나는 이러한 레고브릭이 자본주의 속에 살아가며 목적을 위한 수단이되어 고유한 존재로서가 아닌 원본없는 복제가 되어가는 현대인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생각되었다. 그 결과 인간을 위한다는 목적하에 오히려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인간이 사라져가는 모습이 나타났다. 난 그런 레고브릭 하나와 ‘나와 그것’으로서가 아닌 ‘나와 너’로서의 관계를 맺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온전한 기쁨으로 나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인간이 타락하기전 모든 만물과 온전한 관계를 맺었던 장소가 에덴동산이고 그 동산의 이름인 에덴은 ‘기쁨’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미디엄으로는 회화로 시작하여 사진으로 끝나는 프로세스를 선택하였다. 그 이유로 회화는 내 몸과 레고브릭이 실제적으로 관계를 맺는 지점이다.그 관계는 ‘나와 그것’으로서가 아닌 ‘나와 너’로서의 만남이고 온전한 기쁨의 시간이다. 다른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온전히 나의 몸과 레고브릭 으로만으로 그려진다.  그 과정 속에 나와 너에게 동일하게 묻혀진 물감을 통해 하나로 연합하여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이제 색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물들일수 없었던 레고브릭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빛깔을 갖은 존재가 된다.  그 존재의 빛깔로 시간과 공간으로 의미되는 투명한 물을 물들인다.이로서 기쁨이란 의미의 에덴으로 돌아가고 그것은 관계의 온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즉 이름의 회복은 관계의 회복이다. 서로를 존재 그 자체로서 바라보는 관계를 통해 기쁨으로 나아가는 시간이다.

또한 최종적으로 사진을 통해 표현되는 이유는 사진은 빛으로 그린 그림이고 지표 기호적인 속성을 갖고있다. 그것은 어떤 대상이 어떤 대상과 관계 맺음을 증거한다. 하지만 그 관계맺음은 그 관계맺음을 증거하는 사진을 통해 새로운 의미로 태어난다. 난 이것이 존재와 존재가 관계를 맺고 그 관계의 새로운 의미의 시작으로서 이름을 부여하게 되는 과정과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가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름의 회복은 존재를 어떻게 바라 보느냐의 문제이며 그것을 얼마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 보는가의 문제이고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닌 ‘나와 너’의 관계의 회복으로서 회복되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