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성
이혜성
  • mytwelve
  • 승인 2018.11.12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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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less Flowers2-130X194cm-oil on canvas-2018
Nameless Flowers2, 130X194cm, oil on canvas, 2018
Dry Weeds1, 91x91cm, oil on canvas, 2018
Dry Weeds1, 91x91cm, oil on canvas, 2018
Paradise Dry3, 73x117cm, , 2018
Paradise Dry3, 73x117cm, oil on canvas, 2018
The Breath of Life3, 73x117cm, oil on canvas, 2018
The Breath of Life3, 73x117cm, oil on canvas, 2018
The Breath of Life2, 117x73cm, oil on canvas, 2018
The Breath of Life2, 117x73cm, oil on canvas, 2018
Breath6, 24x41cm, oil on canvas, 2018
Breath6, 24x41cm, oil on canvas, 2018
Breath5, 24x41cm, oil on canvas, 2018
Breath5, 24x41cm, oil on canvas, 2018
Breath4, 33x53cm, oil on canvas, 2018
Breath4, 33x53cm, oil on canvas, 2018
Breath3, 41x24cm, oil on canvas, 2017
Breath3, 41x24cm, oil on canvas, 2017
Breath2, 33x53cm, oil on canvas, 2018
Breath2, 33x53cm, oil on canvas, 2018
Eternality2-1, 73x116.8cm, oil on canvas, 2016
Eternality2-1, 73x116.8cm, oil on canvas, 2016
Eternallife8, 53x45cm, oil on canvas, 2015
Eternallife8, 53x45cm, oil on canvas, 2015

 

쇠퇴와 소멸, 그리고 영원 - 이혜성의 바니타스 회화 -

이혜성의 예술은 삶이란 무엇이며 현재는 어떠한지, 과연 우리는 소비사회에서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에서부터 출발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혜성에게는 이것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요 화두가 된다. 

그의 화면은 한 다발의 드라이플라워 또는 무수한 꽃과 풀들로 채워진다. 그런데 꽃이 주는 예쁘고 화려한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이미 시든 것 또는 시들어가는 것들로 즐비하다. 헤이그의 화가 요세프 이스라엘스(Jozef Isra?ls)처럼 노인을 등장시키지는 않았지만 모든 육체는 노화에 따라 쇠약해간다는 사실을 말하였듯이, 작가는 시들어가는 꽃의 모습을 통해 비유적으로 소멸을 말하고 있다. 

“내 작업의 소재인 마른 풀, 마른 꽃들 역시 소멸의 과정을 거친 것들이다. 방 한가운데 매달려있던 꽃다발이 시들어서 죽어가는 과정을 관찰하며 작업이 시작되었고, 이러한 건초들을 모아 대상 자체에 집중하여 드로잉 하다가, 점차 건초더미들이 모이고 쌓여서 화면을 가득 채운 전면적인 회화로 확장되었다." (작가노트 중에서)

시든 풀과 꽃이 주는 이미지는 찬란하고 힘차기보다는 쓸쓸하고 울적한 것이다. 왕성한 혈기를 자랑하는 청년의 이미지라기보다 고독한 노인의 이미지에 가까우며, 형형한 낮의 이미지보다는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의 이미지에 가깝다. 작가는 왜 이런 장면에 눈을 돌리게 되었을까? 선인들은 우리의 삶을 ‘초로인생(草露人生)’, 즉 우리 인생을 풀잎위에 맺힌 이슬과 같다고 했다. 풀잎위에 맺힌 이슬이 무슨 힘을 쓸 수 있을까? 그의 화면에 쌓인 무수한 꽃과 풀들은 한때 자신을 자랑하는 영광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 역시 단명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충격으로 다가왔을까. 작가가 자신의 방에서 목격한 것은 바로 이러한 영광이 덧없이 사라진다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모든 영광이 들의 꽃과 같이 떨어지고 풀이 시들어버리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쉬워도 그것을 나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용이하지 않다. 잊혀지고 잃는 것이 너무나 두렵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의 인생에 대한 통찰은 초기작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좁은 옷장안의 드레스가 걸려 있는 이 작품은 마치 정신이 빠져나간 육체가 줄지어 도열해있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 연작에서 작가는 드레스라는 이미지를 통해 현대인의 혼란스런 모습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지만 정작 내일을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삶의 외양과 유행에 집착하는 사이 내적인 삶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소재를 드레스에서 시든 꽃으로 옮겨오면서 의미내용이 더욱 분명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즉 드레스를 소재로 한 작품이 인생의 종착지에 대해 질의하였다면, 시든 꽃에 있어서는 삶의 좌표를 어디에 설정해야 할지 질의하고 있다. 어찌 보면 그의 예술은 염세주의나 회의주의로 오인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그의 작품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가 작품내용과 모순된 또는 라는 타이틀을 고수하는 이유는 냉철한 삶의 인식에 기인한 것이다. 

“시들어버린 꽃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무력한 인간을 비유하는 상징물 중 하나이다. 화려하게 피어났던 꽃이 시들어지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싹, 잎, 꽃이 피어나고, 열매를 맺고, 다시 시들어진다. 생물체에서의 소멸 시기는 생성(재생)의 시점으로 가는 필연적인 과정이 되며,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노트 중에서)

왜 우리는 짧은 인생을 사소한 것들에 그토록 연연하며 보내는 걸까? 과거의 화가들이 메멘토 모리로 삶의 유한성을 표현한 것은 시대의 오만한 수호자들에 대한 경고였다. 지금도 그런 일이 안 일어난다고 말할 수 없다. 과거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부족하지 않다. C. S 루이스(C,S Lewis)는 소비사회에서 우리가 ‘무한한 만족’보다는 ‘즉각적인 만족’을 열망하도록 다시 프로그램 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무한한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데도 술과 섹스와 야망 가운데서 배회한다면 우리는 마지못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바닷가에서의 휴가 제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빈민굴에서 진흙 파이나 만들고 싶어 하는 무지한 어린 아이와 같다”(C.S Lewis, The Weight of Glory)고 했다. 이렇듯 소비지상주의가 초래한 위기는 욕망을 끝없이 부추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이유보다 ‘진흙파이’를 만드는 것과 같이 훨씬 못한 욕망에 만족하도록 유도된다는 것이다. 

루이스의 말처럼 우리는 ‘진흙파이’에 만족한 나머지 ‘무한한 기쁨’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다. 작가가 시든 꽃에 시선을 돌린 진짜 이유는 인생무상, 즉 바니타스(Vanity)를 깨달아야 비로소 ‘무한한 기쁨’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진실을 일깨워준다. 

바니타스 작품을 보면 얼마나 우리의 삶이 구겨진 휴지조각처럼 초라해 보이는지 모른다. 즉 자아와 인간성이 상실되어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예술이 도움을 주는 것은 사물들의 종말과 욕망의 종착점에 대비해 우리의 합리적, 감각적 자아를 준비시켜주는 상상의 힘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혜성의 작품은 역설적으로 한정된 시간과 공간속의 인간이 지닌 삶이 얼마나 의미있는 것인지 인식시켜준다. 유한함과 덧없음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들이 있기에 더욱 영원한 가치가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의 바니타스 회화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성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해보고 거기에서 소중한 가치와 찬란한 보화를 발견하라고 주문한다. 우리 삶을 보다 의미 있고 숭고하게 펼쳐갈 수 있도록 충격을 던지는 것, 거기에 이혜성의 시선이 향해 있지 않을까?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