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의 고통 중에 임한 위로
거절의 고통 중에 임한 위로
  • 강준민
  • 승인 2018.11.01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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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당한 고통은 큰 고통이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후에 누구에겐가 무엇을 구하며 살아간다. 또한 누군가는 우리에게 찾아와 무엇인가를 부탁한다. 우리는 거절을 당하기도 하고, 또한 우리도 거절하며 살아간다. 거절에는 양면이 있다. 적절하고 지혜로운 거절은 좋은 것이다. 유혹을 거절하고, 잘못된 지름길을 거절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보증을 서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함으로 오랜 세월 고생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또한 우리는 거절을 당한다. 어떤 경우에 거절을 당한 것이 후에 잘 된 경우도 많다. 그래서 거절의 양면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거절의 상처는 아프다. 때로는 그 상처는 우리 깊은 내면을 찌르는 고통으로 찾아온다. 

거절의 아픔은 버림받은 느낌을 통해 임하는 고통이다. 버림받은 경험은 정말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어린 아이는 평생 동안 버림을 받았다는 고통을 안고 살 수 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라는 영화에 보면 거스 로벨(클린트 이스트우드)과 그의 딸 미키(에이미 아담스)의 대화가 나온다. 거스는 무뚝뚝하고 독단적이다. 미키는 독단적인 아버지와 소통이 안 되어 고통을 받는다. 세월이 흘러 미키는 변호사가 되었고, 33살이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 거스에게 절규하며 묻는다. “아버지가 왜 날 버렸는지 미치도록 궁금했어요.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아버지가 귀찮은 듯 대답한다. “나이 들어 힘없고 지친 늙은이란다. 날 그냥 내버려두면 안되겠니?” 

사실은 아버지가 딸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슬프게도 딸이 어릴 적에 엄마가 죽었다. 아버지가 혼자 딸을 키우는 중에, 창고 같은 곳에서 6살 난 딸을 성폭행하려는 남자를 목도한다. 그 남자를 죽도록 때린 거스는 딸을 보호하기 위해 친척집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을 알지 못한 딸은 아버지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또한 자기가 아버지의 버림을 받은 것은 본인이 무엇인가를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미키는 계속해서 신경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아 왔던 것이다. 

거부의 고통이 깊은 까닭은 거부의 상처는 친밀한 사이에 주고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을 받곤 한다. 늘 상처는 가까운데 있는 사람들을 통해 받게 된다. 우리와 정말 가까운 사이, 가까이 하고 싶은 사이에서 우리는 거절을 당한다. 버림을 받는다. 

버림을 받을 때 우리는 좌절하게 된다. 특별히 정말 신뢰했던 대상, 기대를 갖고 살았던 대상에게 버림을 받을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된다. 기대며 살았던 사람에게 버림을 받을 때 우리는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한다. 인간은 서로를 기대며 살게 되어 있다. “인간(人間)”이란 한자를 유심하게 살펴보라. 특별히 “인(人)”이란 한자를 살펴보면 인간이란 서로 기대어 사는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서로를 기대어 서게 되고, 서로를 기대면서 힘을 얻는다. 서로에게 기댄다는 것은 서로를 신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기대했던 사람이 우리를 버릴 때 기대고 섰던 나무가 쓰러진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때로는 부모가 부득이 자녀를 몇 개월 또는 일 년이나 이년 동안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맡긴 것 까지도 자녀에게는 버림받은 아픔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버림받음의 상처가 깊은 까닭은 그 경험이 우리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쓰레기를 정기적으로 버린다. 오래 되어 쓸모없는 것들을 버린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버린다.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물건들을 버린다. 그런 까닭에 누군가의 버림을 받는 순간, 우리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느낌을 갖게 된다.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 되어 버린 느낌을 갖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가치 있는 존재, 쓸모 있는 존재,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길 원한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의 버림을 받는 순간, 스스로 무가치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버림받은 감정을 잘 추스르지 못할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슬픈 경우를 보게 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수많은 거절과 수없는 버림받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실연의 아픔도 버림받은 아픔이다. 

청소년들의 사랑의 경험은 황홀한 경험이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경험이다. 청소년들에게는 부모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 친구요, 사랑하는 대상이다. 부모가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것을 친구가 이해해주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비밀을 사랑하는 친구에게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청소년기에는 가장 소중한 것이 소속감이다. 그런데 실연을 경험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는다. 이런 경험은 청소년들만의 경험은 아니다. 나이가 든 사람들도 똑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갑자기 찾아오는 시련이 힘든 까닭은 그런 경험을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것 같은 느낌을 갖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를 당한 느낌을 갖기 때문이다. 거부의 감정은 저주 받은 느낌과 같은 감정이다. 인간은 연결되고 연합될 때 힘을 얻는다. 그런데 거부와 저주를 통해 단절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무력해 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은 감정이다. 감정은 거대한 에너지다. 문제는 감정이 너무 강렬해지고, 감정이 증폭되면 이성이 마비가 되는 것이다. 특별히 부정적이면서 파괴적인 감정이 우리를 압도하면 인식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인간은 좌뇌와 우뇌가 조화를 이루고 통합될 때 평강을 누리며 살 수 있다. 좌뇌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기능을 가졌다. 우뇌는 상상하는 기능, 감정을 느끼는 기능을 가졌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만나면 두려움, 염려, 좌절, 그리고 절망과 같은 감정이 강렬하게 임하게 된다. 그때 경험하는 버림받았다는 감정이 증폭되면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게 된다. 버림 받았다는 감정이 증폭되면 자신을 버린 것 같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상대적 분노가 일어나게 된다. 감정은 오고가는 것인데 감정을 잘 다스리지 않으면 감정은 점점 더 강렬하게 일어나게 된다. 그때 극단적인 생각이 떠오르게 된다. 그런 까닭에 버림받은 감정은 잘 다스려야 한다. 

거절 받은 느낌은 상실감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구하고, 그것을 기대한 것을 얻지 못할 때 상실감을 경험한다.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도 상실이지만, 마땅히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주어지지 않을 때도 상실감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한 것이 우리가 원하는 때에 주어지지 않을 때 거부감과 상실감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거절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가장 올바른 이해는 거절을 삶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거절을 받으며 성장하고 성숙해 왔다. 우리가 원하는 학교에 지원했지만 떨어지는 경험을 한다. 우리가 원하는 직장에 지원했지만 떨어지는 경험을 한다. 특별히 보험이나 물건을 파는 사람은 수많은 거절을 경험하게 된다. 요즈음 목회자들이 너무 많이 배출되어서 목회지가 하나 나오면 수많은 목회자들이 지원을 하게 된다. 하지만 수많은 지원자들 가운데 한 명만 담임 목회자로 청빙을 받게 된다. 이것은 교수 자리를 지원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몇 백대 일, 몇 천대 일의 경쟁 속에서 취업이 결정이 된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절을 당하며 살고 있는가! 또한 수많은 청년들이 결혼을 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스스로 싱글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혼을 원했지만 거절을 당해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이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나가달라는 권고를 받았다. 정말 열심히 섬겼고, 성심을 다해 섬겼는데 떠나라는 것이었다. 거절당한 느낌이었다. 거부당한 느낌이었다.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아니 내가 성실하게 섬겼던 교회에서 버림을 받은 것이다. 지금도 가끔 그 당시 꿈을 꾼다. 며칠 전에도 버림 받는 꿈을 꾸었다. 내가 겪은 트라우마 중에 하나인 것이 분명하다. 물론 마음과 말로 그들을 용서했다. 용서를 빌었다. 용서를 넘어 복을 빌어주었다. 하지만 나의 내면 깊은 곳에 버림받은 상처가 남아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어찌 교회에서 버림받은 목회자의 경험이 나만의 경험이겠는가. 수많은 목회자들이 교회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그가 섬기던 교회에서 버림을 받았다. 

실패보다 더 고통스러운 경험이 거부다. 존 오트버그는 그의 책 《관계 훈련》에서 그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실패는 ‘우리의 계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거부는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거부는 우리의 내면을 건드린다. 거부는 우리를 움츠러들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움츠러들면 선뜻 남들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친밀함을 힘들게 만든다. 거부에 대한 두려움은 온갖 모험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존 오트버그, 『관계 훈련』, 두란노, 253쪽)

실패의 상처보다 거부의 상처가 더 깊다. 그래서 거부의 상처를 너무 쉽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거부당한 사람들을 위로하신다. 우리는 성경에서 거절당하고, 거부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만난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거절을 당하고 버림을 받았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동족들에게 거절을 당하고 버림을 받았다. 바울도 그의 동족으로부터 여러 번 배척당했다. 그의 동족이 그를 죽이려 했다. 가장 극심한 거절을 당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십자가상의 절규가 예수님의 거부의 고통을 보여준다.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6)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거절을 당하셨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거절당하고 버림을 당한 사람들의 아픔을 아신다.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신다. 그들을 위로하신다. 하나님은 거절의 고통을 당한 사람들을 몇 가지 방법으로 위로하신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약속을 통해 위로하신다. 
거부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받으심(acceptance)이다. 용납이다. 환영이다. 복음은 죄인을 받으심이다. 품에 안으심이다. 또한 결코 버리지 않으심이다. 하나님은 자주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신 31:6하)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수 1:5하)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3:5하)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94:14)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심으로 위로하신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바울의 위대한 선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대변한 선언이다. 정죄는 좋은 것이 아니다. 정죄는 상대방을 형편없는 존재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는 “상대방을 정죄하는 것은 그가 전반적으로 지독히, 돌이킬 수 없이 나빠서 거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버림받은 존재로 취급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존 오트버그는 진실을 말하는 것과 정죄는 다르다고 가르쳐 준다. 

진실을 언급하는 것과 정죄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좋은 치과 의사는 충치에 관한 진실을 밝히되 그것으로 인해 우리를 비난하지 않는다. 정죄는 단순히 상대방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진술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악의를 담아서 말하는 것이다. “치실질을 한 번도 안 했군요. 그러니 당연히 썩죠. 아주 자-알 하셨습니다!” (존 오트버그, 『관계 훈련』, 두란노, 265쪽)

우리는 예수님이 버림받으심으로 하나님께 환영 받는 자가 되었다. 

셋째, 하나님은 거절하신 이유를 깨닫게 하심으로 위로하신다. 
바울은 세 번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주시길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간구를 거절하셨다. 그리고 거절하신 이유를 깨우쳐 주셨다. 그 이유는 그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더욱 강하게 임하게 되기 때문이다(고후 12:9-10). 

넷째, 하나님은 우리가 거절당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허락하심으로 위로하신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것을 거절당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좋은 것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거절한 것보다 더 좋은 것, 최상의 것을 준비하고 계신다. 당장은 알지 못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 실상이 드러나게 된다. 아브라함이 이삭 대신에 하나님께 구했던 것들을 하나님은 거절하셨다. 그리하심으로 그에게 가장 좋은 이삭을 주셨다. 요셉도 같은 경험을 했다. 

다섯째, 하나님은 거절당한 경험을 통해 우리를 성숙케 하심으로 위로하신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안락함이나 편안함이 아니라 성숙에 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데 있다. 우리는 거절당한 아픔을 통해 거절당하신 예수님의 고통을 알게 된다. 그 고통에 참여하게 된다. 또한 수많은 거절의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감하게 된다. 그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게 된다. 상처가 상처를 치유한다. 고통이 고통을 치유한다. 거절당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거절당한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거절은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의 변장된 축복이다. 거절의 상처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깊고 섬세하고 온유하게 만드신다. 

우리는 거절을 당하시고 버림을 받으신(사 53:3) 예수님 때문에 성삼위 하나님께 연합된 존재가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으신다. 우리는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 보배로운 존재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셨다. 그래서 나는 거절당하신 예수님께 매일 나아가서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거절의 상처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위로한다. 


강준민
L.A. 새생명비전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