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말을 걸어온다
음악이 말을 걸어온다
  • 이대헌
  • 승인 2018.09.28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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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신상명세서’란 걸 처음 쓴 것이 군대 입대 후라고 기억하는데, 써넣어야 할 것들 중에 ‘취미’란에는 늘 ‘음악 감상’이라고 적었다. 보통 ‘독서’라고 쓰는 사람이 많은 것 같고 요즘에는 ‘멍 때리기’라고 쓰는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가벼운 마음으로 써 넣는 경우라면 나는 ‘음악을 들으며 멍 때리기’라고 쓸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자대 배치 받은 후에 전입병으로 중대장과 면담을 할 때 음악 감상이라고 쓴 것 때문에 질문을 몇 가지 받았다. 어떤 음악을 감상하느냐? 가요냐, 팝이냐, 클래식이냐? 오래 전이라 재즈는 묻지 않았다. 클래식이면 좋아하는 작곡가는 누구냐?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브람스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주저 없이 브람스라고 대답했고, 그러면 브람스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해서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우리 중대장은 군의관이었고, 나중에 보니 그도 브람스와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브람스 덕분에 전방지역이었지만 중대장과 신병이 음악 이야기를 할 기회가 더러 있었다.
  
군대시절 이야기는 짧게 할수록 좋다는데 짧게 하면, 보초나 불침번을 설 때 졸음이 오고 길게 느껴지는 시간을 음악을 떠올리면서 보냈다. 긴 협주곡이나 교향곡을 떠올리면 그 시간은 쉽게 지나간다. 다 생각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럴 때는 흐트러진 악보를 간추리는 것 같은 마음으로 연결해 나가면 대체로 해결된다. 나 혼자 머리속으로 떠올리는 음악이니 순서가 좀 다르면 어떤가. 한 번은 비오는 날에 사단 본부에 일보러 갔다가 점심시간에 부대 내 스피커에서 들리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식당 처마 끝에 서서 듣기도 했다. 소리 자체는 열악하기 그지 없었겠지만 그 선율을 들으며 행복해했다. 그 후에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때도 출퇴근 길에 카세트 플레이어로 좋아하는 곡을 들으면 서울이라는 복잡한 도시도 눈만 감으면 고향 같고, 직장도 즐거운 일터로 느껴지고 그랬다. 

다시 음악 이야기로 돌아와서, 오늘은 음악을 구분해서 듣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앞에서 말한 중대장의 질문처럼 클래식이냐, 가요냐, 팝이냐를 칼로 자르듯이 구분하고 우열을 매기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에 대하여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여기에서는 이론이나 학문적인 토론은 배제하고 글쓴이의 견해만 쓰려고 한다.

음악은 듣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클래식은 클래식대로, 대중음악은 대중음악대로, 민속음악은 민속음악대로. 그리고 곡마다 다른 이야기를 한다. 어떤 사람은 클래식이 하는 이야기가 좋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트로트의 이야기가 좋을 수 있다. 가사가 있는 것은 가사로도 이야기하고, 가사가 없는 것은 선율로만 이야기한다. 어떨 때는 가사 없는 곡에 말하고 싶은 의미를 담아 가사를 붙이기도 한다. 음악이 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음악의 숲으로’에서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음악은 문학과 달리 작가와 수용자(청자, 혹은 독자) 사이에 연주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아무리 작곡가가 곡으로 이야기하려고 하고, 연주자가 해석하여 작곡가와 같은 이야기 혹은 연주자의 이야기를 전하려 해도 듣는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한다면, 듣는 사람에게는 그저 울리는 소리일 뿐일 것이다. 아무런 이론을 몰라도 듣기만하면 감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음악도 있지만, 음악 이론이나 배경 지식이 있으면 더 감동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내 경우에는 어느 음악이나 듣지만 굳이 찾아듣지는 않는 음악이 있다. 굳이 찾지 않는다는 것이지 피하거나 혐오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듣기를 좋아하고, 찾아보고, 새로운 정보는 없는지 계속 관심을 갖는 음악이 분명히 있다. 그것은 내 취향일 뿐이고 누구에게 강요하거나 할 생각은 없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을 걸어오는 음악이라면, 그리고 거기에서 위안을 얻고, 그것으로 좀 더 행복해진다면 그에게는 그 음악이 가장 좋은 음악일 것이다.
다만, ‘음악의 숲으로’에서는 클래식 음악이라고 불리는 음악을 주로 다루려고 하고, 특히 클래식 음악이 낯설지만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지난 번 글에서 듣기를 권했던 곡 ‘콜 니드라이(Kol Nidrei)’는 막스 브루흐의 곡인데, 막스 브루흐는 바하 만큼이나 기독교 정신에 투철했던 작곡가이다. 콜 니드라이는 유대교의 ‘속죄일’(레위기 23장 26-32절)에 불렀던 가사가 있는 곡이다. 이 곡을 브루흐가 관현악과 독주 악기 첼로가 연주하는 협주곡 형식으로 작곡했다. 

소설가 최인호가 월간 샘터에 기고했던 연작 소설 ‘가족’에서도 이 곡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그가 2층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었는데, 아래층에서 어린 아들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려서 조용히 하라고 고함질렀다고 한다. 누나와 남동생이 싸우면서 울어서 그랬는가 했는데, 식사 자리에서 딸 아이가 말하기를 동생이 운 것은 싸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음악을 듣다가 그랬다는 것이다. 그의 집에는 보통 클래식 FM 방송을 틀어놓는데 그 중의 어느 곡을 듣다가 울었다는 것인데, 다음 날 방송사로 전화해서 그 아이가 울었던 시간쯤에 방송된 곡이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아마도 ‘콜 니드라이’일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곡에 대해 자료를 찾아봤다고 하면서 어린 아이에게도 음악이 주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속죄 같은 종교적인 의미를 모르는 아이도 눈물을 흘리게 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 

한 세미나에서 음악을 듣고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게 했을 때, 이곡을 들은 사람들은 첼로 음색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대부분 중년 혹은 노년의 남자가 힘들게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 그리고 걸어가면서 그가 가는 이 길이 맞는지를 누군가에게 질문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 곡을 들은 여러분에게는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첼로 연주가 아닌 합창으로 연주한 콜 니드라이(로버트 쇼 합창단의 “Songs of Faith and Inspiration” 중에서 “Kol Nidre”)도 있으니 찾아서 들어볼 것을 권한다. 그리고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이 그의 작품 중에서 많이 연주되는 곡인데 이곡도 기회 있을 때 들어보시기 바란다. 전 악장이 지루하다면 2악장만이라도 좋겠다.

이번에 들을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중 ‘10월 - 가을의 노래’이다. 비발디의 사계는 우리나라 클래식 음반 판매 1위를 오래 했던 유명한 곡이지만 차이코프스키의 사계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아마도 많은 피아노 연주자들이 앵콜 곡으로 연주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을은 독서하기에만 좋은 계절이 아니고, 음악 듣기에도 참 좋은 계절이다. 물론 그냥 놀기에도 가장 좋은 계절이지만.  차이코프스키의 ‘10월’이 걸어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풍성한 가을을 맞으시기 바란다.

 

 


이대헌
학창시절 아는 음대생들이 ‘브람스’라고 불렀고, 아직도 크로매틱 하모니카로 ‘틸레망 따라 불기’를 꿈꾸는 언론학 전공의 60대 사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