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선교사 도라유와 서울 서촌 복음벨트
중국인 선교사 도라유와 서울 서촌 복음벨트
  • 전정희
  • 승인 2018.09.14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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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들림 받는 것 아니면 순교하는 것
서울 배화여대(옛 배화학당) 캠퍼스 내 모녀상. 선교사 캠벨과 도라유가 6명의 가난한 소녀를 대상으로 시작한 이 학교는 한국 기독여성 인재를 배출하는 산실이 됐다. 모녀상 뒤로 북악산이 보인다.
서울 배화여대(옛 배화학당) 캠퍼스 내 모녀상. 선교사 캠벨과 도라유가 6명의 가난한 소녀를 대상으로 시작한 이 학교는 한국 기독여성 인재를 배출하는 산실이 됐다. 모녀상 뒤로 북악산이 보인다.

‘미국 남감리회는 1896년 한국 서울에서 사역을 시작했으며 이듬해 해외 여선교회도 뒤따랐다. 캠벨 부인은 1887년부터 중국에서 음악 교사로, 학교 교장으로, 병원 보조자로, 그리고 여성들을 위한 복음 사역자로 섬겼다. 여선교회 본부로부터 한국 사역 개척 요청이 있자 그녀는 양녀인 여도라와 함께 기쁘게 응답했다.’(‘미국 남감리회 여성과 선교’ 기록 중)

도라유의 양모 조세핀 캠벨(1853~1930). 배화학당과 자교·종교교회를 설립했다.
도라유의 양모 조세핀 캠벨(1853~1930). 배화학당과 자교·종교교회를 설립했다.

캠벨 부인(조세핀 캠벨·1853~1920). 1897년 10월 한국 선교를 위해 제물포항에 도착한 캠벨 부인을 두고 한국인들은 ‘강부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스크랜턴 대부인(스크랜턴 선교사의 어머니)과 함께 한국 여성복음화와 계몽에 앞장선 선교사이자 교육자다. 서울 사대문 안 배화여대, 자교교회와 종교교회가 그로부터 시작됐다.
 

도라유(1873~1931)
도라유(1873~1931)

여도라(余慈度·1873~1931). 캠벨이 중국 쑤저우 선교 때 얻은 양녀로 당시 한국인들은 ‘여소저’로 불렀다. 통상 도라유라고 칭한다. 중국 기독교 ‘최고의 복음전도자’라는 수식이 붙는 부흥운동가다. 도라유는 중국 순교자인 위치만니(1903~1972)를 감화시켰던 인물이기도 하다. “인생은 결국 들림 받는 것 아니면 순교하는 것”이라는 기도 고백이 위치만니에게 영향을 미쳤다. 위치만니는 중국 공산혁명 기간 20여년을 단지 예수의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수감생활을 하다 숨졌다.

중국인 도라유 선교사와 초대 한국교회 

그 낯선 인물 도라유를 찾아 서울 옛 도심을 걸었다. 지난주 서울 중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앞. 흔히 소공동이라 불리는 한국은행 본관과 박물관 자리는 캠벨 부인과 도라유가 내한했을 무렵 미 남감리회 한국선교부의 예배당과 사택, 주일학교 터가 있던 곳이다. 당시 남송현으로 불렸다. 캠벨과 도라유는 제물포항에서 증기선을 타고 용산에 내렸고 남감리교 한국인 첫 신자 윤치호(1865~1945·개화파 정치가)가 마중 나왔었다.

1907년 윤치호가 교장으로 있던 개성 한영서원. 목총 든 학생들이 군사훈련을 했다. 사진 왼쪽으로 십자가기와 태극기가 보인다. 윤치호는 첫 남감리회 신자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말년 친일파로 변절하고 만다. 홍성사 제공
1907년 윤치호가 교장으로 있던 개성 한영서원. 목총 든 학생들이 군사훈련을 했다. 사진 왼쪽으로 십자가기와 태극기가 보인다. 윤치호는 첫 남감리회 신자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말년 친일파로 변절하고 만다. 홍성사 제공

‘언덕을 따라 들어선 세 채의 좋은 건물이 있는데 두 채는 남선교부에, 한 채는 여선교부에 속해 있습니다. 부지 아래쪽 민가에 인접한 건물이 예배당이며 리드 박사(한국선교부 책임자)는 그곳에서 여름 성경학교를 열고자 합니다.’

캠벨 선교사는 선교본부를 돌아보고 이렇게 첫인상을 표현했다. 캠벨에게 도라유는 친딸 이상이었다. 미국에서 남편 캠벨 목사와 두 자녀를 병사로 잃고 주님이 빈자리를 채워주길 기도했던 그는 하나님 명령에 따라 중국 선교사로 나갔고 그곳에서 도라유를 만났다.

도라유는 외과 의사이자 장로교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그는 남감리회 해외여전도회가 중국에 세운 중서여숙 의과대학 최초 졸업생이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의대 2년차 무렵 숨졌다. 조실부모한 도라유는 캠벨로부터 위로를 받았고 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며 의료사역과 전도부인으로 살 것을 서원했다. 그는 캠벨의 한국사역 동행 요청이 있기 전 영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라유의 삶을 연구한 권지영 목사(서울 평동교회 부목사)는 “그는 한국사역 6년간 의사 교사 번역가 설교자 심방자로 배화학당(배화여대 전신)과 자골교회(자교교회 옛 명칭) 초기 선교 사역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며 “특히 자골교회 공동체에서 1년 반 동안 주요 설교자로 단 위에 서기도 했다”고 밝혔다.
 

1898년 9월 미국 남감리회 제2회 한국선교회 연례회의에서 선교사 가족들과 함께한 도라유(사진 오른쪽 중국 복장). 앉아 있는 남성 두 명 중 오른쪽은 리드 박사(선교사)와 그의 가족이다. 홍성사 제공
1898년 9월 미국 남감리회 제2회 한국선교회 연례회의에서 선교사 가족들과 함께한 도라유(사진 오른쪽 중국 복장). 앉아 있는 남성 두 명 중 오른쪽은 리드 박사(선교사)와 그의 가족이다. 홍성사 제공

캠벨과 도라유의 한국 선교사 파송과정에서는 한국 초대교회사의 맥락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 중심인물이 윤치호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신사유람단 일원이 되어 일본을 왕래했던 윤치호는 신학문과 영어 일어를 습득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교계 지도자 나카무라를 만나 신앙인이 되어 간다. 그는 대한제국 통리통상사 무아문 주사 겸 미공사관 통역관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선교에 큰 역할을 하는 매클레이 선교사를 만났고, 그를 당시 권력자 김옥균에 소개해 조선 땅에서 미국 개신교의 ‘의료·교육활동 허가’를 받는다.

그러나 김옥균의 ‘성급한 쿠데타’ 갑신정변으로 안전이 위협 받자 윤치호는 상하이로 탈출, 그곳 미 남감리회 중국 선교부가 운영하는 중서서원에 입학했다. 윤치호는 더 나아가 미국 밴더빌트대 신학부와 에모리대학에서 인문사회 분야를 공부하기도 했다.

서울 서촌, 도라유 헌신으로 복음벨트 
그는 미국 유학 중 주일예배 설교와 주일학교 집회 등 150여회의 강연을 통해 한국 중국 일본 복음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200달러를 모아 에모리대학 캔들러 총장에게 맡기며 한국 등 극동에 기독교학교 건립에 써달라고 해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윤치호는 알렌(1858~1932) 박사의 요청으로 상하이로 돌아와 모교 중서서원 영어교사가 된다. 거기서 중서여숙 교장 헤이굿 선교사의 중매로 중서여숙 의대 출신 중국인 마애방과 결혼한다. 이어 윤치호는 1895년 마애방과 함께 10년 만에 귀국해 김홍집 내각의 학부협판 자리에 오른다.

윤치호는 이때 미 남감리회 선교부에 한국에도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는 ‘시급한 요청(urgent request)’을 보낸다. 미 남감리회는 곧 헨드릭스 감독과 리드 목사가 고종을 알현하게 된다. 이때 알현을 주선한 이가 알렌이다. 알렌은 중국 의료선교사에서 주한 미국공사가 되어 있었다. 고종은 “조선은 좋은 교사들을 많이 보내어 한국 인민문화 발달에 기여해 달라”고 분부했다. 남감리회는 이내 남송현 선교부를 확보했고 뒤이어서 남감리회 해외여선교부 선교사 캠벨을 파송했다. 더불어 도라유도 조선에 들어왔다.
 

청와대 옆 자교교회(오른쪽). 지금의 서촌 일대는 캠벨 선교사의 사역지였다.
청와대 옆 자교교회(오른쪽). 지금의 서촌 일대는 캠벨 선교사의 사역지였다.

남송현 선교부 위치는 이미 자리 잡은 미 북감리회와 장로회 선교사들의 권역이었다. 윤치호는 선교적 낭비로 보았고 이에 따라 개성과 고양 지역에 거점을 두기 시작했다. 윤치호는 중서서원을 본떠 개성에 한영서원(송도고보 전신)을 세웠다. 이런 윤치호는 말년 친일파가 되고 말았다.

캠벨도 새로운 사역지를 찾아 나섰다. 장흥고(長興庫·궁중물품 조달관리 관청)가 있던 지금의 서울 서촌 일대에 예배당과 학교를 세운다. 장흥고 앞터는 미국 침례교 선교부 소유였으나 그들이 충남 공주를 중심으로 사역을 하면서 캠벨이 인수한 것이다. 장흥고 앞은 자골로 불렸고 캠벨은 그곳에 자골교회를 세웠다.

남송현에서 시작됐던 매일학교도 이곳으로 옮겨와 캐롤라이나학당(배화학당 전신)이 됐다. 도라유는 학교 서기이자 교사로 한글 한문 생리학 성서 지리 뜨개질실습 등을 가르쳤다. 이 학교 첫 학생은 한국선교부 수장 리드 박사 사택 수위의 딸 박수와 김갓난 등 6명이었다.

도라유는 마애방과 중서서원 동창으로 막역했다. 두 사람은 한자문화권 사람이었으므로 한국어를 쉽게 익혔다. 캠벨은 ‘도라유가 나보다 한국어를 빨리 배우고 있기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녀는 의료와 전도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를 돕고 그밖에 다른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라는 선교 보고를 남겼다.
 

자교교회에서 분립된 종교교회로 현 정부서울청사 뒤에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자교교회에서 분립된 종교교회로 현 정부서울청사 뒤에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배화60년사’ 기록에는 ‘수양녀 도라유 양이 한국말을 쉽게 배웠고 윤치호 박사의 부인 마애방이 한국말을 잘하므로…’라고 당시 재학생들의 기억을 구술로 남겼다.

캠벨의 도라유에 대한 보고 기록이다. ‘오후 4~6시까지 있는 실업 수업에서 도라유는 무릎을 꿇은 채 학생들을 가르친다. 코바늘과 뜨개질 자수 등이다. … 2명의 학생들은 도라유의 감독하에 아픈 이들의 간호를 맡게 되었고 온도를 재는 법과 호흡법을 배우고 있다. 우리 학교가 간호사를 배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초대 한국교회 여성선교의 밀알
도라유는 1897~1903년 오직 기도와 선교 사명으로 캠벨을 신앙의 어머니 삼아 여성 선교에 힘썼다. ‘자골교회 예배당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한 여성의 수가 1529명, 아이들이 362명’(1902년 선교보고서)이었는데 도라유가 설교자였다. 캠벨은 “여도라는 자신의 설교를 매우 주의 깊게 듣는 경청자들을 가졌다”고 적었다.

도라유는 1899년 건강상 이유로 일시 귀국했다가 이듬해 1월 복음사역을 계속하기 위해 다시 입국했다. 입국 후 교인이 증가하면서 일이 세 배가량 늘었다. 교육과 의료, 기타 복음 사역 때문이었다.(‘중국기독교인물사전’에 실린 기록)

한데 배화학당을 중심으로 서촌 일대가 성령 바람이 불 때 돌연 도라유가 영구 출국했다. 또다시 ‘건강상의 이유’였으나 거기엔 비밀이 있다. 권력자 김영준 경무사(경찰청장 격)의 집요한 구애 때문이었다. 스토커 수준이었다.

서울 종로 배화여대 캠퍼스 내 옛 배화학당 건물과 캠벨 선교사 흉상.
서울 종로 배화여대 캠퍼스 내 옛 배화학당 건물과 캠벨 선교사 흉상.

오늘날 배화학원 캠퍼스에는 캠벨과 도라유 등이 세운 적벽돌 건물 ‘캐롤라이나관’ ‘캠벨기념관’ 등이 지금도 건재하다. 등록근대문화재 등으로 보존되고 있다. 배화 캠퍼스에 서면 경복궁과 청와대, 자교교회와 그 교회에서 분리된 종교교회 등이 보인다.

도라유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격동의 한국사에서 ‘초대 한국교회 여성선교’의 밀알이 됐다. 그의 젊은 시절 한국선교 6년은 훗날 ‘중국의 위대한 여성 부흥가’의 삶으로 이어졌다. 그런 도라유를 알아갈수록 빚진 자가 되는 심정이다. 

권력자 구애에 시달린 여선교사
옥성득 교수(미국 UCLA 한국기독교학)의 연구에 따르면 대한제국 시기 서자 출신 김영준은 고종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했고, 한편으로 금의환향한 윤치호를 부러워했다. 친러시아 보수파 김영준은 신분상 양반가의 딸을 맞이할 수 없자, 윤치호처럼 고등교육을 받은 중국인 여성 도라유에게 구애했다.

그러나 도라유는 세속적인 권력가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거부하자 김영준은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1900년 중국 의화단 사건의 영향을 받아 친러 보수파 이용익과 함께 기독교인 살해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고종 황제의 칙서를 날조해 살해를 명령하는 가짜 문서를 각 지방에 내려보낸다.

다행히 언더우드가 이를 발견하고 에비스와 알렌 선교사에게 알려 미연에 방지한다. 김영준은 1903년 영종도 매각 부패사건과 관련돼 교수형에 처해졌다. 옥 교수는 “김영준의 구애행각에 3년간 시달린 도라유는 중국으로 돌아가 1908년부터 중국 부흥운동의 주역이 됐다”고 밝혔다.



전정희
국민일보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