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위에 임한 위로
상처 위에 임한 위로
  • 강준민
  • 승인 2018.07.09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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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위로는 상처 위에 임한다. 우리는 상처를 싫어하고, 상처 받는 것을 싫어한다. 상처를 받으면 아프다. 깊은 상처는 깊은 고통을 낳는다. 깊은 상처는 깊은 상흔(傷痕)을 남긴다. 그래서 상처를 싫어한다. 상처를 받으면 그 고통 때문에 움츠러든다. 상처를 받으면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두려워진다. 그래서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그 울타리 안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새로운 만남을 거부하고, 만남이 깊어지는 것을 거부한다. 그 이유는 만남이 상처를 만들어 내었고, 만남이 깊어질수록 상처도 깊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누군가 찾아오면 피상적인 만남에만 머물기를 원한다. 피상적인 만남을 갖게 되는 한 상처 입을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처를 싫어하지만 하나님은 상처를 통해 우리를 축복하신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신다. 마음이 상했다는 것은 마음이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상처의 신비다. 하나님은 상처 없는 사람을 가까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을 가까이 하신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34:18). 마음이 상한 자에 담겨 있는 상한이란 히브리어는 샤바르’(שָׁבַר, shabar). ‘샤바르상처를 입다. 파열하다. 깨지다. 부수다. 산산이 부서지다. 으스러뜨리다. 찢다. 출산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제물로 기뻐 받으신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51:17). 상한 마음이란 상처 입은 마음이다. 몸의 상처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마음의 상처다. 그런데 하나님은 상처 입은 마음을 긍휼히 여기신다.

 

하나님의 친밀하심은 상처를 통해 임한다. 상처가 없이는 친밀함도 없다. 상처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친밀하게 만드는 은총의 도구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 안긴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해 주신다.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147:3).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기 위해서다(61:1). 예수님은 상처를 받으심으로 상처 입은 자를 치료해 주신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은 예수님을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불렀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상처투성이가 되셨다. 예수님의 온 몸이 상처였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셨다. 온 몸에 채찍을 맞으셨다. 손과 발에 대못이 박혔다. 옆구리는 창으로 찔림을 받으셨다. 예수님의 몸만 상처투성이가 된 것이 아니라 마음도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으신 상처와 거절당하신 상처는 마음에 큰 아픔이었다. 사랑하던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셨을 때 예수님의 마음은 큰 상처를 받으신 것이 분명하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몸과 마음이 모두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이 왜 상처를 받으셨는가를 잘 설명해 준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림을 받으셨다. 우리의 죄 때문에 상함을 받으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53:5). 예수님의 상처가 없이는 우리의 구원도 없다. 우리의 치유도 없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5).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상처를 사랑하고, 상처를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우게 된다. 우리의 상처를 통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상처를 진주로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된다. 예수님의 상처에서 쏟아져 나온 피와 물이 우리 죄를 정결케 한다(19:34). 상처가 없다면 보혈도 없고, 생수도 없다. 상처가 없으면 영광도 없다. 영광이란 영화로움이다. 영광이란 아름다움이다. 상처가 없으면 아름다움도 없다. 그래서 상처는 보석과 같다. 하나님이 상처를 보배처럼 여기시는 이유가 있다.

 

첫째, 상처를 통해 모든 풍성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씨앗은 땅에 떨어져 상처를 입어야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 씨앗의 생명은 껍질에 있지 않고 씨눈에 있다. 씨앗의 껍질이 부서지고, 깨어지고, 상처를 입을 때 그 상처 사이로 생명이 흘러나오게 된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고 말씀하신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경험이 씨앗의 껍질이 벗겨지는 경험이다. 씨앗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깨어지고 벗겨질 때 아프다고 소리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없이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상처가 없이는 열매도 없다.

 

둘째, 상처를 통해 새 생명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자궁에 아이가 잉태되면, 아이는 그 자궁 안에서 10개월 동안 자라게 된다. 때가 충만히 차면 어머니의 양수가 터지면서 아이가 태어난다. 그때 어머니의 몸에서 피와 물이 쏟아진다. 소중한 아이는 어머니의 몸이 찢어지는 아픔과 더불어 태어난다. 양수가 터질 때 어머니의 몸은 찢어지는 상처를 입는다. 그 상처 사이로 아이는 태어난다. 상처가 없이는 어린 아이가 태어날 수 없다. 우리는 상처를 통해 이 땅에 태어난 생명들이다.

 

셋째, 상처를 통해 아름다운 향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향기를 통한 치유가 있다. 좋은 향을 통해 우리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수는 발칸 산맥의 장미에서 나온다고 한다. 발칸 산맥의 장미로 향수를 만드는 사람들은 가장 춥고 어두운 시간인 새벽 2시 경에 장미를 딴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장미는 한밤중에 가장 향기로운 향을 품어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장 추운 시간에 따낸 장미가 향수로 만들어질 때 장미는 으깨어진다. 상처투성이가 된다. 장미가 상처를 받아 짓이겨질 때, 가장 향기로운 향수는 만들어진다. 그래서 복효근 시인은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라고 노래한 것 같다.

 

장미는 향기로워 그 상처도 아름답다. 향나무가 찍히고 찍혀도 향을 발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의 상처는 장미처럼 향기롭고, 향나무처럼 향을 발하는 상처다. 어떤 상처는 치유되지 않아 독이 되고, 썩은 냄새를 발한다. 하지만 어떤 상처는 향을 발하고, 그 향기로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한다.

 

넷째, 상처를 통해 진주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개가 진주를 만드는 과정을 잘 안다. 조개에 이물질이 들어오면 조개가 상처를 받는다. 조개가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힌 이물질을 감싸고 또 감싸는 중에 진주가 만들어진다. 상처 없이는 진주가 없다. 상처가 클수록 진주가 크다. 상처의 크기가 진주의 크기를 결정한다.

 

다섯째, 상처를 통해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기 때문이다. 접붙임은 구속의 비밀이다. 바울은 우리가 본래 돌감람나무였는데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11:17). 참감람나무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고 말한다. 접붙임은 연합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아 예수님과 연합하게 될 때 예수님의 풍성한 생명을 공급 받게 된다. 조니 에릭슨 타다는 접붙임을 위해 상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접붙이는 것은 나무와 나뭇가지에 상처를 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그 수술을 할 때 나무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면, 중심부가 잘리고 낯선 접가지를 자기 살 속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달갑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나중에 여름이 되어 새 가지에 풍성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면 곧 생각이 바뀔 것이다. (조니 에릭슨 타다, 조니 에릭슨 타다의 희망 노트, 두란노 122)

 

상처가 없으면 접붙임도 없다. 접붙임은 예수님의 상처와 우리의 상처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상처를 통해 흘러나오는 보혈의 생명, 성령의 생수를 공급받게 된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게 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 받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다. 친밀한 사랑과 친밀한 연합에는 반드시 상처가 필요하다. 상처를 두려워하면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깊어진다.

 

사랑한다는 건 그 자체로 상처받기를 허락하는 것이다. 뭘 사랑하든 분명 가슴이 미어질 것이며, 심지어 부서질 수도 있다.” -C. S. 루이스-

 

상처가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해 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했던 휘장이 찢어졌다(27:51). 히브리서는 그 휘장이 예수님의 육체라고 증거한다(10:20). 예수님의 몸이 찢어져 상처를 받으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살 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언제든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4:16).

 

상처는 정말 신비롭다. 우리가 싫어하는 상처가 우리를 그토록 복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상처가 보배가 된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를 사랑하신다(42:3; 12:20). 우리는 갈대다. 그냥 갈대가 아니라 상한 갈대다. 상처 입은 갈대, 부서진 갈대, 으스러진 갈대다. 버림받은 갈대다. 실패한 갈대다. 거절당한 갈대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연약한 갈대를 사랑하신다. 상처가 없으면 사랑도 없다. 나의 대부분의 글은 상처 입은 외로움을 통해 흘러나온다. 그래서 나는 상처를 보배처럼 여긴다.

 

 


강준민
L.A. 새생명비전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