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걸음 젖은 달빛
느린 걸음 젖은 달빛
  • 손철주
  • 승인 2018.06.1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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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숲에 보름달이 떴다. 새들은 짝을 지어 둥지에 깃든지 오래, 시골집마저 밤안개에 가렸다. 달빛은 교교하고 수풀은 적적하다. 선들바람 숨죽이자 어디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 지팡이 짚은 노인이 타박타박 사잇길을 걷는다. 따르는 아이는 등롱을 쥐고 거문고를 들었다. 외져서 쓸쓸하지만 겅성드뭇해도 꽉 찬 그림이다. 되우 멋들어진 정취다. 

숨어사는 고릿적 선비 하나가 집 앞에 세 길을 내고 소나무, 대나무, 국화를 심었다. 그중 맨 먼저가 소나무 길이다. 어려움이 닥쳐도 떠나지 않는 친구가 소나무라 했다. 또한 솔은 손님 맞는 대문이요, 달은 글 읽는 등불이었다. 옛 시인은 한술 더 뜬다. ‘아침에 소나무를 사랑하면 발걸음이 느리고, 저녁에 보름달을 아끼면 창 닫기가 더디다.’ 

소나무 길에서 보름달을 만났으니, 저 노인, 달빛이 옷깃에 스밀 때까지 솔 둥치 쓰다듬으며 소걸음할 테다. 그린 이는 첨절제사를 지낸 화원 이인문이다. 호가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인데, ‘늙은 소나무’가 들어가서 그런지 뒤틀린 소나무와 솟은 소나무 다 잘 그렸다. 이 그림도 이름값을 한다. 가까운 소나무는 짙은 먹이 또렷하고 먼 소나무는 옅은 먹이 아련하다. 수형(樹形)도 서로 다르다. 

그의 또 다른 호는 자연옹(紫煙翁)이다. ‘자줏빛 안개’라는 풀이대로 가지에 감도는 안개는 밤의 흥취를 자아낸다. 문인 이식은 소나무와 대나무가 하는 말을 적었다. 솔이 “눈보라쳐도 굽히지 않는다”고 하자 대가 “눈보라치면 숙여서 맡긴다”고 답한다. 인간사에 빗댄 말일 뿐, 솟거나 숙이거나 나무는 더불어 숲이다. 

 



손철주
미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