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 소설가 김승옥 순천만문학관
[이지현] 소설가 김승옥 순천만문학관
  • 이지현
  • 승인 2018.05.09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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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의 나그네 말씀에 복종하고 기쁨의 빛 얻다

 

'무진의 나그네'는 지금 어느 길목쯤 서 있는 것일까. '감수성의 혁명'이란 찬사와 함께 1960년대 문학의 반짝이는 별이었던 김승옥(75). 그는 빼어난 문체로 당시 미래가 불투명한 젊은이들의 위로자였고, 후배 문인들에겐 넘고 싶은 산이었다. 196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생명연습'으로 등단한 그는 '무진기행' '서울·1964년 겨울' '서울의 달빛 0' 등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80년 장편 '먼지의 방'을 신문에 연재하던 중 신군부의 검열에 항의해 절필을 선언한 후 침묵의 안개 속으로 떠났다. 그 긴 침묵의 길목에서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언어를 잃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인 체험을 했다.

 

지난 17일 단편소설 무진기행의 배경이 된 전남 순천을 찾았다. 소설 속 안개의 도시 무진은 실존하는 지명이 아니다. 작가의 생애와 작품 내용을 고려하면 이곳은 그가 성장한 전남 순천 지역의 공간을 재구성한 것이다. 그도 이 작품을 창작하는 데 있어 순천과 순천만 연안 대대포 앞바다와 그 갯벌에서의 체험을 창작 모티브로 삼았다고 말했다.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1945년 광복이 되던 해 귀국해 어머니의 고향인 순천에서 성장했다.

 

소설가 김승옥에게 '안개'는 하나님이 부재한 '혼돈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후 그는 빛을 따라 걷고 있다. 순천만문학관에서 바라본 외부 전경이다. 왼편으로 순천만 방죽길이 펼쳐져 있다.
소설가 김승옥에게 '안개'는 하나님이 부재한 '혼돈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후 그는 빛을 따라 걷고 있다. 순천만문학관에서 바라본 외부 전경이다. 왼편으로 순천만 방죽길이 펼쳐져 있다.

 

누구나 자신만의 무진이 있다

 

순천만습지 매표소 안내원은 전망대까지 왕복 두 시간가량 소요된다고 했다. 기온은 34. 얼음 생수 한 병을 들고 국내 최대 갈대군락지와 S자 수로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용산전망대에 올랐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그 수려함을 자랑하고 있는 5.4(160만평)의 갈대군락지는 압도적이었다. 갈대숲의 끝은 갯벌이었다.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풍겨오는 수면제 같은 소금기만이 바다가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작가가 무진기행에 이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나는 물이 가득한 강물이 흐르고 잔디로 덮인 방죽이 시오리 밖의 바닷가까지 뻗어 나가 있고, 작은 숲이 있고 다리가 많고 흙담이 많고 높은 포플러가 에워싼 운동장을 가진 학교들이 있고, 바닷가에서 주워온 까만 자갈이 깔린 뜰을 가진 사무소들이 있고, 대로 만든 와상이 밤거리에 나앉아 있는 시골을 생각했고 그것은 무진이었다.”

 

무진은 해안의 도시. 돈 많은 미망인과 결혼해 제약회사 간부로 출세한 한 중년 사내가 쉬기 위해 고향인 무진으로 내려온다. 주인공 윤희중은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 또는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 무진을 찾았다. 무진은 주인공이 의용군 징발과 국군의 징병을 기피하기 위해 숨어 지냈고 폐병을 치료하기 지내던 다름 아닌 자폐의 공간이었다.

 

전남 순천 용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순천만습지의 S자 수로와 광활한 갈대밭 그리고 갯벌.
전남 순천 용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순천만습지의 S자 수로와 광활한 갈대밭 그리고 갯벌.

 

무진의 안개, 불안과 고독

 

주인공은 무진의 짙은 안개 속에서, 속물적 삶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처갓집의 후광을 업고 승진하는 길을 뿌리치지 않는다. 속물성에 대한 혐오와 속물적 욕망의 줄다리기 속에서 무진을 떠나 다시 상경하는 주인공의 자괴감은 어쩌면 4·19세대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60년대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출세주의의 사회 속에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소시민의 모습, 일상에 얽매인 채 고민하는 개인의 모습에 주목했다.

 

그런 의미에서 무진은 일상성의 배후인 안개에 휩싸인 채 도사리고 있는 음험한 상상의 공간이며, 상처를 잊으려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강요하는 이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있는 괴로운 도시다.

 

작가는 한국문학사상 최고의 묘사문 중 하나로 꼽히곤 하는 문장으로 무진의 안개를 이렇게 표현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있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안개는 기상현상의 의미를 넘어선다. 주인공에게 고향 무진은 돌아가야 할 안식처라거나 삶의 고단함에 대한 보상 같은 것이 아니다. 그에게 안개란 습하고 불투명하게 그의 영혼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불안과 고독 같은 것이다.

 

작가에게도 안개의 시간이 있었다. 여순반란 사건 때 아버지가 죽고 3년 후 여동생이 열병으로 죽자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란 것이 절실한 인생의 문제가 되었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영원한 망각 속에서 마치 없었던 것처럼 흩어져 버리고 없음이 돼버릴게 아닌가. 태어나고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 있는가. 아이가 사랑스러울수록 죽음으로 인한 허무감이 더욱 짙게 마음의 밑바닥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이 허무감은 삶의 큰 몫으로 항상 따라다녔다.”(‘내가 만난 하나님중에서)

 

결국 소설 속 주인공은 허위를 벗어나지 못한 부끄러움으로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다. 무진의 안개처럼 언제인지도 모르게 우리의 정신을 포위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 때로는 친밀감마저 느끼게 되는 그 적의 정체를 우리 자신 안에서 만날 때 우리는 비루해지고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비천함에 대한 절규는 주인공의 마지막 고백에서 묻어난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무진기행중에서)

 

순천만문학관 내에 마련된 김승옥관.
순천만문학관 내에 마련된 김승옥관.

방죽길에 서 있는 무진의 나그네

 

순천만 방죽길을 10분 정도 걸어가면 순천만문학관이 나온다. 순천만문학관은 소설가 김승옥과 동화 작가 정채봉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곳이며 주변 순천만과 조화를 이루는 정원형 초가건물 9동으로 건립해 201010월 문을 열었다.

 

김승옥관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이 작가의 말이었다. “소설가란 스스로 이것이 문제다고 생각하는 것에 봉사해야지 어느 무엇에도 구속당해서는 안 된다. 권력자나 부자의 눈치를 살펴도 안 되고 동시에 힘없고 가난한 사람의 비위만 맞춰도 안 된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다만 스스로의 가치에 비추어 문제가 되는 것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

 

김승옥은 무진기행은 나의 생애 중에서 가장 슬픈 시절에 쓴 작품이다. 순천만 방죽길은 무진기행의 가장 중요한 현실적인 배경이었다. 이 소설이 아직도 이야깃거리가 된다면 그것은 그 문장에 스며든 내 슬픔의 힘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누구나 안개의 도시 무진이란 자기만의 공간이 있다.

 

작가에게 안개는 하나님이 없는 혼돈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안개의 어느 길목에서 만난 한줄기 빛(하나님)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안부를 묻는 기자에게 그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20032016 뇌졸중, 미래 말과 글 좋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회복되어 소설로 돌아오는 길에 서 있는 듯했다.

 

김승옥
김승옥

 

[김승옥처럼 생각하기]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며 구원해 주신다"

 

"안녕? 김승옥, 메일 안됩니다 스마트폰입니다." 그가 휴대폰 문자(아래 사진)로 질문에 대한 답을 해왔다. 아름다운 현대적 문체로 수많은 독자를 압도했던 김승옥(사진) 작가는 현재 간단한 단어들을 연결한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는 1980년 절필 선언을 하고 무력감과 절망감 속에 술로 세월을 덧칠해가고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났다. 산문집 '내가 만난 하나님'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81426일 새벽, 하나님께서 내 영안을 여시고 그분의 하얀 손으로 내 명치를 어루만져 주시며 '누구냐?'고 묻는 내 질문에 분명히 한국말로 '하나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손길은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자의 배를 쓸어주시듯 사랑이 가득한 느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나서야 고등학교 시절 성경을 완독한 후 성경책은 이스라엘인들의 독선적인 역사책에 불과하다고 단정하고 무신론자가 돼버린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사실 그가 신앙을 가진 것은 훨씬 더 오래전의 일이다. 그가 11세 때 3세 된 여동생이 심한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장로교회에 출석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 후 주님과 남이 됐다.

 

그는 하나님을 다시 만난 후 거의 글을 쓰지 못했다. 마치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성 프란시스'를 쓸 때 영혼을 압도하는 신의 손을 체험하면서 주체하지 못했던 둔탁한 눈물 때문에 원고를 써내려갈 수 없었다는 고백처럼.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으면 괴로워 견딜 수 없었고 복종할 때의 기쁨은 글 쓸 때의 기쁨과 비교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소설로 선교를 하고 싶어 한다. "무신론자였던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직접적인 은혜 때문이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며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싶다."('내가 만난 하나님' 중에서)

 

그는 죽고 싶은 유혹이 강렬했던 절망의 늪지대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200310'스리랑카의 명령이다'란 목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뇌졸중 치료로 가난해졌으나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스리랑카 선교사를 위해." 소명을 위해 노력하고, 그 길을 향해 나아가는 작가의 삶과 그 길을 응원한다.

 


이지현
국민일보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