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영
김동영
  • mytwelve
  • 승인 2018.03.06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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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racing-2, 81.8X104.5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Embracing-2, 81.8X104.5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Embracing, 72.7x60.6cm, mixedmedia, 2017
Embracing, 72.7x60.6cm, mixedmedia, 2017
Embracing, 72.7x60.6cm, mixed media,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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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racing, 54cmX54cm, mixed media,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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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racing, 41x31.8cm, mixed media, 2016-4
Embracing, 41x31.8cm, mixed media, 2016-4
Embracing, 41x31.8cm, mixed media, 2016-2
Embracing, 41x31.8cm, mixed media, 2016-2
Embracing, 41x31.8cm, mixed media, 2016-1
Embracing, 41x31.8cm, mixed media, 2016-1
Embracing 350x233cm mixed media 201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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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racing, 300 x 172cm, mixed media, 201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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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racing, 85x85cm, mixed media, 201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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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racing, 290x263cm, mixed media, 201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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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racing, 250x250cm, mixed media, 201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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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네잎클로버의 노래-1, 162x130.3cm, mixed media, 2013
09 네잎클로버의 노래-1, 162x130.3cm, mixed media, 2013
11 네잎클로버의 노래-1, 162x97cm, mixed media,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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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네잎클로버의노래, 130x130cm, 혼합재료, 2008
17-네잎클로버의노래, 130x130cm, 혼합재료, 2008
16 네잎클로버의노래, 130x130cm, 혼합재료, 2008
16 네잎클로버의노래, 130x130cm, 혼합재료, 2008
11 네잎클로버의노래, 97x97cm, 혼합재료, 2008
11 네잎클로버의노래, 97x97cm, 혼합재료, 2008
11 네잎클로버의노래, 97x97cm, 혼합재료, 2008
11 네잎클로버의노래, 97x97cm, 혼합재료, 2008

 


은유의 힘과 표현의 장

 

80년대에서 최근에 이르는 김동영의 조형적 역정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식물적 사유와 그것의 구체적인 결실로서의 계시(啓示)적인 형상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80년대의 작품은 식물의 줄기와 잎사귀 또는 꽃의 암시적 영상이 그의 말대로 때로는 무의식 속에서 때로는 의식의 단계에서 <조화된 한 정점을 향한> 과정을 보여주었다. 원환(圓環)의 무브망과 직선의 교차, 화사한 색채의 난무는 생명을 향한 강한 열망을 시사(示唆)로 개념화하고 있다. 미적인 힘은 내부로부터 솟구치는 것이고 그것은 공간을 향해 자신을 산화시키는 아름다운 불꽃, 환희의 원무(圓舞)에 비유되었다. 80년대 후반부터 나타나는 연()의 이미지는 공간에 펼치는 시의 형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창공에 떠가는 연의 팽팽한 존재감은 <미적인 힘>의 보다 구체적인 현상이리라. 사각의 형태, 마름모꼴, 또는 삼각의 형태가 바람을 먹으면서 팽창하는 공간의 차원은 계시적인 형상화에 접근하고 있음을 인식시킨다.

연은 무엇인가. 인간이 새처럼 창공으로 날아오르려는 비상의 표상이 아니겠는가. 연은 단순히 창공에 띄우는 물체이기보다 인간의 비상의 꿈을 매개한 존재다. 연이란 형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꿈의 실체를 구현한다는 점에서 풍요로운 색채의 향연에 상응한다.

 

80년대가 서정적인 서술의 방식을 띈 반면 90년대는 폭발하는 내면의 힘의 용출(湧出)로 인해 한결 격렬한 표현적 추세를 띈다. 때로는 견고한 외형과 부단히 이를 와해하는 분방한 소용돌이가 더욱 극적인 상황으로 유도해가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게 한다. 혼돈과 질서의 충돌과 파해가 더욱 깊은 성찰의 내면을 반영하는 것일까. 확실히 80년대의 화면에서 볼 수 없었던 뜨겁고도 무거운 기운이 지배한다. 색채는 더욱 강렬한 대비의 차원으로 진행되는가 하면 형태는 때로는 분명한가 하면 또 때로는 모호한 단계로의 진입을 사양하지 않는다. 표현은 사유를 앞질러 스스로 자립하려는 열망에 차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점에서야말로 내면과 외면의 조형적 갈등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구현되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김복영이 90년대의 작품을 두고 다음과 같이 피력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진다.

 

"종래에 비해 한결 자유로워진 근작들을 이 글의 표제-연의 은유, 생명의 이원성과 무의식적 충동의 세계에 있어서의 자아의식-가 말해주는 것과 같이 연의 은유를 삶 내지는 생명의 이원성의 조화를 모색하고 이를 무의식적 충동의 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려는 방법으로 처리함으로써 그 외면과 내면의 넓이가 무한히 팽창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확실히 90년대는 변화에 대한 충동이 곳곳에 명멸한다. 작은 사각의 형태들이 보이는 구체성, 그것의 규칙적인 배열, 콜라쥬를 통한 화면의 변화는 조형적 변혁의 점진적인 추이임이 분명하다. 사각의 형태들은 연의 변주로서 여전히 화면에 서식하며 여기에 엉키는 연줄들은 질서와 자유의 대비적 차원을 강조해준다. 초기에서부터 싹터난 식물적 사유는 더욱 은유의 체계로 진행되면서 상상의 풍요로움을 대변해준다.

 

2000년대의 근작은 보다 분명한 형태의 맹아(萌芽)로 뒤덮인다. 식물적 사유는 이제 네잎 클로버의 형상으로 구현되어 나온다. 그러면서도 알레고리와 상징은 더욱 풍부한 내면의 차원을 이룬다. 네잎 클로버는 단순한 식물의 형태는 아니다. 그것은 행운이란 상징성을 띈 식물로 등장한다. 형태상으로 네잎 클로버는 좌우상하의 대칭이 분명한 균형을 지니면서도 실은 생물학적으론 정상이 아닌 돌연변이로 간주된다. 그러기에 그것이 행운을 상징한다는 것은 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작가는 행운이란 이런 돌연변이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 있음을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행운을 찾으려고 한다. 사람들이 찾고자하는 행운은 손에 닿을 듯 말듯 하다가도 닿지 않으면서 닿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네잎 클로버를 찾고 또 찾는 것이다. 행운은 네잎 클로버 속에도 어디에도 없다"

 

작가의 말대로 행운은 네잎 클로버 속에 있지 않다. 그러기에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네잎 클로버는 부재하는 행운을 아이러니칼하게 은유해 주고 있다. 바로 주변에 있는 일상 속에 행운이 있음을 역설적으로 상징해주고 있다. "행운은 항상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이 행운은 더 높고 더 고차원적인 곳에 또는 더 고상한 곳에 있다는 생각 때문에 찾을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는 것이다" 라고 작가는 거듭 말한다. 그러기에 그가 그리는 네잎 클로버는 행운은 어디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고 평범함 속에 있다는 것을 은유해 줌으로서 새로운 이미지로 떠오른다.

 

그의 근작은 넓이로서의 외연보다 깊이로서의 내연에 더욱 기울어진 면모를 보인다. 화면으로서 지지체와 이미지로서 클로버는 이원적 공간의 차원을 만듦으로써 더욱 풍부하고 여유로운 장의 구현을 가능하게 한다. 말하자면 지지체로서의 바탕과 이 위에 서술되는 이미지는 서로 오버랩 되면서 실재하는 평면과 그 위에 서술되는 또 하나의 평면이란 이원성을 지니게 된다. 여기에 공간으로서의 깊이가 만들어진다. 화면에는 무수히 사라지는 잔영과 또 새롭게 형성되는 이미지들로 시간의 차원을 만든다. 없어지는 것과 생겨나는 것의 교차가 만드는 풍부한 기억의 늪이 화면 가득히 자리 잡는다. 이제 화면은 씨앗이 뿌리내려 싹을 틔우고 줄기와 잎을 대지 위에 밀어 올리는 자연의 섭리를 표상하는 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만큼 화면은 무언가 결정된 것이 아니라 진행되는 순간순간에 있다. 살아 숨쉬는 현재 속에 놓여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으리라. 네잎 클로버는 그런 의미에서 화면이란 대지 위에 싹트고 자라나는 살아있는 식물이 된다.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 대지위에 덮이는 것이야말로 행운이고 기적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의미에서 클로버로 대변되는 식물적 사유는 자신의 예술을 지탱해주는 근간이 되고 풍요롭게 가꾸어지는 대지는 무르익어가는 예술의 상황이 되는 것이리라.

 

2010.10 오광수(미술평론가, 예술위원회 위원장)


 

김동영,네잎 클로버의 노래

김동영이 작품의 모티브로 삼는 것은 네잎 클로버이다. 이곳저곳에 둥지를 튼 크고 작은 클로버들은 질화로같이 따듯한 온기가 남아있는 추억의 이름으로 다가온다. 누구나 경험했을, 어릴 적 산과 들을 헤집고 다녔던 기억들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황창순 시인의 네잎클로버란 시에는 어릴 적 잔디밭에 꿈을 찾아 노닐다가 풀꽃반지 한두 번 손가락에 끼워보지 않은 사람 있을까/행운을 상징하는 의미있는 그대는 네 잎의 날개를 달고 기쁨을 선사했네란 구절이 나온다. 분명 김동영의 회화작품을 볼 때도 시인이 말한 것과 같은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동영의 회화는 자연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고 있지만 그렇다고 자연의 재현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같지는 않다. 자연의 재현 자체를 겨냥했다면 사실성에 주의를 기울이고 디테일에 신경을 기울였겠지만 그의 작품은 오히려 네잎 클로버를 암시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이미지는 상징성을 띠면서 여러 색채와 질료와의 어울림속에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작품을 볼때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이미지라기보다는 조형적인 부분, 즉 산뜻하거나 그윽한 색감과 확산적인 공간감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두 요인의 발란스를 맞추어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소재의 감각적인 부분과 그것을 떠받쳐주는 형식이 숙성되어 있고 잘 영글어져 있는 셈이다. 전체가 물흐르듯 자연스럽다.

특히 조형적 내재성을 잘 엿볼 수 있는 부분은 경쾌한 필선담백한 질료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점을 검토해보면, 첫째 그의 화면에서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경쾌한 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운필의 표정을 감지할 수 있는데 순식간에 어떤 형태를 만들어놓은 것에서 액센트를 가한 것, 묵직한 힘이 실려있는 것, 날쌘 제비가 물을 차고 올라가듯 날렵한 것, 낙서하듯 자유롭게 그은 것까지 여러 표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필선은 화면에 운동감을 주면서 그림을 흥겹고 경쾌하게 만든다. 춤추듯 그림에 활력을 넣는 것은 그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구김살없는 필선 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

둘째는 여러 재료에 의해 구축되는 담백한 질료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화면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밑칠과 지우기, 그리고 다시 채색과 같은 요인의 반복에 의해 이루어진다. 특히 화면의 정황을 살펴보면 마치 도장처리한 듯 매끈한 면이 있는가 하면 뚝배기처럼 우둘두툴한 면, 솜이불처럼 포근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의 면이 있다. 같은 화면에서 여러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작가는 입자가 굵은 돌가루를 섞고 캔버스를 오려붙이는 등 무엇보다 바탕처리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특히 근래에는 돌가루와 콜라주를 사용하여 잔잔한 조형의 울림을 지닌 깊이감있는 공간을 구축해내고 있다. 왜 그는 화면의 질료감에 주의를 기울일까. 바탕의 질료감이란 논밭과 같아서 비옥한 농지가 되어야만 풍족한 소출(所出)을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논밭이 거칠고 메말라 있다면 만족할만한 소출을 기대할 수 없듯이 그림에 있어서도 비옥한 바탕이 전제될 때에 비로소 소정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찌게의 맛을 내려면 잘 우려낸 육수를 써야하듯이 말이다. 김동영이 질료감은 이런 기본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근작에선 단순화가 눈에 띄는데 공간을 몇 개의 포름으로 나누거나 차분한 색조가 자주 목격된다. 몇몇 작품에선 신라 토기를 연상시키는 기와색조가 그림의 격조를 높여준다. 물감으로 얻은 색조가 아니라 자연이 조성한 것같은 무채색은 세월의 나이테가 켜켜이 새겨있는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산전수전을 다 겪은 뒤에 찾은 어떤 안도감과 평화로움을 연상시킨다. 그 색은 인공의 색이 아니라 신비를 머금고 있는 색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작품의 내적인 부분을 살펴보았으므로 작품의 중핵이 무엇인지 점검해야 차례가 온 것같다. 그의 작품은 네잎 클로버로 가득차 있다. 네잎 클로버가 그토록 많다는 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차원을 넘어 뭔가 뚜렷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과연 작가가 행운을 상징하는 네잎 클로버에 애착을 기울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네잎 클로버의 꽃말인 행운이란 우리가 예상치 않게 횡재를 하거나 수지를 맡았을 때 찾아온 복을 일컫는다. 가령 전혀 기대하지 않은 기회을 맞았을 때 우리는 행운을 잡았다고 말한다. 작가가 행운을 상징하는 네잎 클로버를 고수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삶을 축복의 연속이라고 여기며, 행운은 바로 자기 자신이며 자신안에 있고, 자신의 삶속에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삶의 통찰은 크리스천으로서의 인생관과 무관하지 않은 것같다. 즉 삶 자체를 창세전부터 하나님이 예정하신 일이요 선물로 여겨 하나님의 자녀됨과 자신의 존재를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영국의 시인인 토마스 트래험(Thomas Traheme)이 그랬듯이 그도 세상을 무한한 아름다움을 비추는 거울” “장엄한 사원” “빛과 평화의 영역으로 받아들이는 것같다. 어찌 인생에 황홀한 무지개빛만 있으랴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세상을 경이로운 눈으로 지켜보며 어떻게 나날의 기적이 펼쳐지고 있는지에 주목한다. 자신의 일상을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성소요 계시의 장소로 여긴다. ‘네잎 클로버는 일상속에 편재하고 있으므로 매순간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그의 작품을 보면 영혼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환희에 몸을 내맡긴 것같은 느낌을 받는다. 환희가 작품의 일상음료와 양식이 되게 만들고 있는 것같다. 예술가가 이런 환희를 작품안에 저장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만약 젊음의 활기를 잃고 휘청거리거나 비틀거리는 사람이라면 피클을 만들고 보존하듯이 기쁨의 가락이 자신을 절이고 보존하게 만드는 것이 요구된다. 그 기쁨이 나를 움직이는 연료가 되게 하려면 항구적인 영원의 샘물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지구가 낮에 밝은 것은 태양이 비추고 있음 때문이요 밤에 환한 것은 달이 비추고 있기 때문이듯이 자아가 환희에 휩싸이는 것은 진리의 접목 또는 조명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 필자는 실재와의 만남과 진리의 구속이 이전에 깊고 심오한 세계를 경험했던 신앙인들처럼 김동영의 회화를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다고 믿는다.

서성록(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


 

 

아름다운 공속(共屬), 보듬어 안아 가슴에 품다

- 김동영의 ‘Embracing’ 연작에 대한 소고 -

김동영의 신작 ‘Embracing’은 짧게는 지난 10여년의 탐색을, 길게는 30년이 넘도록 천착해온 주제와 형식을, 부드럽게 보듬어 안아 넉넉하게 품었다. 2014년 미국 산타모니카와 일본 사바에시()에서 개최된 개인전 이후 햇수로는 1년 만이지만, ‘Embracing’이 품에 안아 펼쳐 보이는 내적인 시간은 그 폭이 상당하다. 오랜 기간의 작업을 관통해온 생명에 대한 찬미와 절대자의 섭리에 대한 긍정이 자연스러운 호흡처럼 캔버스의 안팎을 들고 나는 이번 신작은 그 결이며 품이 더 없이 맑고 넓다.

밖으로 펼쳐 열린캔버스가 안으로 품어 안은것은 존재의 처소요 생의 숨결이다. 가상의 회화적 공간 대신에 숨결과 기운이 감도는 실체적인 존재의 터가 열려 있다. 숨결과 기운은 이미 네 잎 클로버를 모티프로 한 지난 연작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바였지만, 이번 신작에서 작가는 조형적인 틀과 구성을 한층 자유롭게 열어 놓고이질적인 재료와 기법을 더욱 과감하게 감싸 안아유례없이 두드러진 개방(開放)과 포용(包容)의 태도를 취했다. 무심코 일별하는 경우 전작들과 사뭇 달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얼핏 단절처럼 보이는 이 유례없는 개방과 포용은 오히려 그 오랜 탐색이 시작된 최초의 시원(始原)에 연결된 연속이라 해야 옳다. 30여년 전 미국에서 돌아와 개최한 국내 첫 개인전에 즈음하여 예술은 내 모든 것을 바치는 자신과의 서약이라 고백하며 맺었던 그 오랜 약속을 작가는 이번 신작에서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이행(履行)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미적 힘신앙의 힘이야말로 존재의 두 근원이자 동일한 원천임을 천명하며 예술과 신앙이 자신 안에서 합일(合一)하기를 소망하였다. 그 오랜 약속과 소망을 담은 이번 신작에서 바야흐로 미적 힘신앙의 힘서로에게 속하며 동시에 자체의 자유를 구가하는아름다운 공속(共屬, Zusammengehörenlassen)의 관계를 펼쳐 보인다. 개방과 포용의 태도는 바로 이 공속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니, 보듬어 안아 서로를 품는 ‘Embracing’이라는 명명이 제안된 이유가 헤아려진다.

 

품다: 공속의 원리

긴 세월을 품어 안은 ‘Embracing’은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에 있어서는 후()이자 귀결(歸結)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선()이요 항상 모든 것의 앞()에 놓이는 계기(契機)의 차원에 존재한다. 계기란 어떤 사태가 일어나게 하거나 기존의 상태가 변화하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인 바, 계기로서의 ‘Embracing’은 시원의 약속과 소망을 상기하며 끝없는 생성과 변화를 개시하는 계속되는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전 작업이 분방한 붓질과 선명한 색채로 생의 에너지를 발산했다면 ‘Embracing’은 넉넉한 여백과 담담한 무채색이 더해져 연륜과 지혜를 품어 안았다. 눈에 띄게 커진 캔버스는 숨결이 들고 나는 넓은 터가 되어 환하게 트여 있고, 작은 네잎 클로버는 거대한 나무로 변형되어 그 넓은 터에서 자라나고 있다. 자유로운 드로잉으로 그어낸 선()과 경계에 구애받지 않은 면()은 그간의 작업에서처럼 생생한 몸짓과 순간적인 시간성을 담고 있지만 표면 너머의 넓은 터에 스며들어간 느낌이 더 강해졌다.

‘Embracing’의 생성과 변화는 서로 함께 속하는아름다운 공속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크게 보아 형식 차원에서 시간-공간의 공속이, 내용 층위에서 존재-진리의 공속이 발견되는데, 이는 다시 조형의 힘과 생성의 이치가 공속하는 전체 안에서 조화롭게 합일하고 있다. 이전의 클로버 풀잎이 실루엣이나 그림자로 출현하거나 거대한 나무로 솟아올라 있어 과거-현재의 시간적인 지속을 유지하는가 하면, 실루엣을 처리한 즉흥적인 선과 거목을 이룬 넓직한 면은 다시 박음질된 실과 드리워진 레이스로 확장되어 공간적인 변화-생성의 진폭을 넓혔다. 선과 면이 실과 레이스로 전개되는 강한 변주(變奏)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직조된 레이스가 클로버 풀잎을 기본 패턴으로 하여 짜여 있고 실과 끈이 이미 초기 작업에서부터 의미 있는 재료로 사용되었음을 기억한다면, 공간적인 확장이 시간적인 지속에 속한 채로 그 자체의 자유를 구가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일찍이 하이데거는 공속관계를 두고 존재의 진리를 향해 인간본질이 생기(生起)하는 연관이라 일컬었다. 특히 그는 공속이란 진리를 향해 자신을 실어-나름(Zu-trag)’으로써 진리와 존재가 자기 안에서 근원적으로 화합하는 모아들임(die in sich ursprünglich einige Versammlung)’이라고 설명하였다. 진리를 향해 나 자신을 실어 나름으로써 그 진리를 내 안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는 공속은 따라서 나와 진리가 서로에게 함께 속하여 친밀하게 하나로 어우러지는관계라는 것이다.

그것과 하나가 되기 위해 그것에게로 나를 실어 나른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진리는 개념으로 파악되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향해 자신을 실어 날라’ ‘내 안에서 스스로 섭리하도록해야 하는 존재-합일의 대상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진리가 존재자 안에 섭리하여 그 존재자가 변화하고 전환되었을 때 비로소 진리와 존재의 공속이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Embracing’ 연작의 형식적인 변화는 진리가 스스로 존재 안에서 현성(現成)하게하려는 근원을 향한 전환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기호를 넘어 응답으로

‘Embracing’ 연작에서 특히 주목되는 실()과 글(logos)은 바로 이 실어-나름으로부터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캔버스를 뚫고 들어간 실이 물리적인 차원에서 나를 실어 나르며 시간-공간의 공속을 이루고 있다면, 밝게 열린 터에 길을 만들며 밀알처럼 퍼져있는 글은 고백하고 찬미하는 말과 음성에 나를 담아 존재-진리의 공속을 실현하고 있다.

캔버스에 박음질된 실은 오래 전 선의 이미지나 생명의 상징으로 콜라주 화면에 부착되었던 실과 끈에 연결되어 있다. 작가에게 선, , , 실은 서로를 은유하거나 대체하며 오랜 세월동안 중요한 모티프와 주제로 사용되어 온 것이다. 1988<불타는 생명줄>등 연()과 연줄을 모티프로 한 일련의 회화를 선보였던 작가는 나는 내 작업 속에서 보이지 않는 가늘고 긴 줄을 항상 간직하고 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당시 생명과 존재, 진리와 본질에 연결되는 비가시적인 끈으로 언급되었던 줄은 이제 ‘Embracing’에서 엮고 꿰매고 수놓는 본래 그대로의 실로 등장한다. 조형적으로는 화면의 공간을 가르며 에너지의 흐름을 표시하거나 풀잎의 실루엣이 되어 점선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무언가를 대신하는 기호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천을 뚫고 들어가 화면의 앞에서 뒤로, 다시 뒤에서 앞으로 들고 나며 실제적인 실로 존재한다. ‘자신을 실어 날라캔버스를 관통하는 실은 회화의 표면과 이면을 뗄 수 없는 하나의 실체로 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에게로 자신을 실어 나르는공속의 행위는 커다란 캔버스에 밀알처럼 흩어져 있는 텍스트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다. 넓게 열린 터를 과감하게 품어 안아사면팔방의 여러 각도에서 길을 열듯 써넣은 복음서의 구절들은 찬양의 목소리가 되어 경계 없이 메아리친다. 밝은 광목 빛이나 깊은 먹빛 속에서 은혜’ ‘기도’ ‘선지자’ ‘영광’ ‘당신등의 근본-언어가 출현하며 존재의 처소에 생의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나의 모든 것을 바치는 서약으로 시작된 진리에 대한 작가의 공속은 마침내 진리를 향해 자신을 실어 날라 서로를 품어 안는방식으로 펼쳐지고 있다. 진리가 그 안에서 스스로 섭리하도록 한 것이다. ‘Embracing’이 시각적 기호나 미적 상징을 넘어 서약의 이행이자 부름에 대한 응답인 이유다.

 

정은영 (미술사 박사, 한국교원대학교 교수)